문화일반

[문화재로 보는 우리 역사]내금강에서 해금강까지 신비의 비경을 한 눈에

46. 민화 `금강산도'

◇금강산도(金剛山圖)-필자 미상. 조선19-20세기.

조선 초 금강산도와 관련한 기록은 중국의 사신이 와서 금강산 그림을 요청하거나 왕(세조)이 몸소 금강산을 유람하고 와 화사에게 금강산을 그려 오라고 파견하는 등 특별한 계층에 해당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조선 중기 이후 산수 유람이 점차 확산되고, 보다 많은 사람이 금강산에 다녀오고, 직접 가 보지 못한 많은 사람이 금강산을 동경하면서 금강산 그림도 신분과 계층을 뛰어넘어 유행했다. 19세기가 되면 민화 금강산도가 다수 그려지는데 이러한 현상은 17~18세기 모란도(牡圖)나 문자도(文字圖)가 왕실과 양반 계층에서 제작, 사용, 향유되다가 19세기 이후 민화 형식으로 많이 그려지는 것과 같다.

민화 금강산도는 병풍 형식으로 제작됐다. 내금강, 외금강에서 해금강까지 이어지는 넓은 지역에 다채롭게 펼쳐지는 금강산의 전모(全貌)를 한눈에 담기 위해서는 화첩이나 두루마리보다 병풍 형식이 알맞았다. 금강산도는 금강산의 전모를 그린 그림이기 때문에 그 원류가 되는 그림은 금강산전도다. 정선이 그린 '금강내산총도(剛內山總圖·간송미술관 소장)'와 '금강전도(剛全圖·리움 소장)'가 대표적인데 금강산의 전체 모습을 축약해서 그린 모양이다.

금강산도 병풍은 처음에는 정선의 '금강전도'를 가로로 긴 화면에 펼쳐 주로 내금강의 모습을 담았고, 각 폭이 하나의 화면으로 연결되는 형식이었다. 그런데 금강산 탐승(探勝)이 내금강에서 외금강의 여러 명소까지 확대되면서 내외 금강산의 명소를 모두 담은 병풍이 다수 제작됐다. 국립춘천박물관 소장 '금강산도' 역시 여행의 시작을 상징하는 '단발령망금강(斷髮嶺望剛)'이나 금강산 초입에 있는 내금강의 대표 사찰 '장안사(長安寺)'가 맨 앞부분에 등장해서 마지막 폭에는 해금강인 총석정으로 끝나는 구도를 보여준다. 이렇게 내외 금강산의 명소들을 담은 금강산 그림은 각 폭이 나뉘어 단발령, 장안사, 표훈사, 정양사, 만폭동, 보덕굴, 일출봉, 월출봉, 묘길상 등의 내금강과 신계사, 옥류동, 은선대, 불정대, 백천교, 유점사, 온정각 등의 외금강이 그려졌다. 총석정 등의 해금강은 구성에 포함되기도 하고 빠지기도 했다.

처음에 금강산 그림은 금강산에 다녀온 사람들이 탐승의 기억을 간직하기 위해 그렸는데, 민화 금강산도에서는 금강산에 가지 못하는 더 많은 사람에게 신비한 비경(秘境), 비현실적인 이상향(理想鄕)의 의미로 다시 환원됐다.

<이혜경 국립춘천박물관 학예연구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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