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일반

[조선시대핫플레이스,강원의명소는지금]고려 불교예술 진면목 뽐냈을 사찰 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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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원주 흥법사지

◇원주 흥법사지 삼층석탑(위쪽).

원주 지정면 안창리 밭 가운데 우뚝 솟은 삼층석탑

뒤편으로는 몸돌 잃어버린 진공대사탑비 남아있어

고려 태조가 글 짓고 당 태종의 글씨 모아 새긴 비석

고려~조선 후기 시문·지리서 등에 언급 많았던 연유

흥법사 폐찰 후 조각나 방치 국립중앙박물관 보관

인근 민가·농지서 기와 출토 … 당시 사찰 규모 짐작

원주 지정면 안창리로 향했다. 안창대교를 건너자마자 좌측에 흥법사지 안내판이 보인다. 앞쪽으로 섬강이 흐르고 뒤편에 영봉산이 아늑하게 감싸는 곳에 절터가 자리를 잡았다. 높은 축대는 성곽처럼 견고하게 보인다. 축대 뒤편으로 펼쳐진 밭 중앙에 삼층석탑이 우뚝하다.석탑 뒤편으로 거북받침돌과 머릿돌만 남아 있다.

받침돌의 머리는 거북이라기보다 용에 가깝다. 여의주를 물고 있는 입과 부라린 눈은 금방이라도 달려들 기세다. 땅바닥을 딛고 있는 네 발은 힘이 넘쳐난다. 정육각형 안에 만(卍) 자와 연꽃을 새긴 등껍질은 섬세하기 그지없다.

머릿돌은 기운생동하는 용틀임이다. 구름 속에서 다투고 있는 두 마리의 용은 비늘마저도 꿈틀거린다. 정신 차리고 보니 네 마리가 양 귀퉁이에서 노려본다. 뒷면에도 한 마리가 하늘을 향해 날아가고 있다. 전서체로 쓴 글씨는 진공대사라는 네 글자가 선명하다. 웅장한 기운이 넘치면서도 섬세하게 표현한 장인의 솜씨에 그만 넋을 잃었다. 고려 전기의 불교 예술의 수준을 가늠할 수조차 없을 정도다. 받침돌과 머릿돌을 눈높이에서 볼 수 있기 때문에 이렇게 감동적일 것이다. 특히 머릿돌의 경우 바로 앞에서 보기가 쉽지 않다. 흥분이 가라앉자 몸돌을 잃어버린 채 한 몸이 된 받침돌과 머릿돌이 부자연스럽게 보이기 시작한다.

고려부터 조선 후기의 김정희에 이르기까지 많은 글에 흥법사가 오르내렸다. 시에도 등장하고 지리서에도 언급되며 편지글에도 등장한다. 무엇 때문일까? ‘고려사절요'는 충담(忠湛)이 죽자 흥법사에 탑을 세우고 왕이 친히 비문을 지었다고 적는다. 1530년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은 더 자세하다. 절에 비가 있는데 고려 태조가 친히 글을 짓고, 최광윤에게 명령하여 당 태종의 글씨를 모아서 모사하여 새겼노라고 알려준다. 고려의 이제현은 “뜻이 웅장하고 깊으며 위대하고 곱다. 글씨는 큰 글자와 작은 글자, 해서와 행서가 서로 섞여 있어서 마치 난새와 봉황이 일렁이듯 기운이 우주를 삼켰다. 진실로 천하의 보물이다.”라고 글과 글씨에 찬탄했다.

고려 태조가 글을 짓고, 당 태종의 글씨를 모아서 새겼기 때문에 호사가들이 그토록 흥법사의 비석을 언급했던 것이다. 이후의 기록은 반복하여 칭찬하거나 훼손된 것을 아쉬워하는 글이다. 기운생동한 받침돌과 머릿돌 때문이 아니었다.

흥법사가 폐찰이 되면서 비석은 기구한 운명에 처하게 됐다. 성현(成俔·1439~1504년)이 원주에 감사로 부임하여 고을 안에 있는 관음사를 살펴보니 반 토막 난 비석이 보였다. 부녀자들이 옷을 다듬질하고 소들이 뿔을 비벼서 글자가 닳고 획이 떨어져 나간 상태로 방치되다시피 했다. 원래 있던 자리에서 고을 안의 관음사로 옮겨졌던 것이다. 이민구(李敏求· 1589~1670년)의 기록은 이후의 일을 알려준다. 비석에 새긴 글씨를 탁본하려는 이가 줄을 잇자, 오고 가는 것이 번거로워 비석을 관아에 옮겨 놓았다. 객관 모퉁이에 작은 집을 지어 비각을 세우고, 내력을 기록하여 후대 사람들이 보전할 수 있게 했다. 지금은 여러 조각으로 깨진 채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제자리를 지키고 있어야 하지만 타향에서 떠도는 것은 진공대사탑비만이 아니다. 진공대사의 유골을 모신 승탑과 관련 유물을 담았던 석관도 같은 신세가 됐다. 1931년에 경복궁으로 옮겨졌고, 현재는 용산의 국립중앙박물관 뜰에 있다. 염거화상탑도 흥법사에 있었다고 전해진다.

주변을 돌아보니 민가에 석축으로 쓰인 돌도 범상치 않다. 불당이 있던 자리인 듯하다. 기와 파편은 흥법사지 구역뿐만 아니라 옆의 민가와 밭에서도 대량으로 출토됐다. 흥법사지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절터에 조선 중기의 문신인 허후(許厚)를 모신 도천서원(陶川書院)이 들어선 것은 1693년이었다. 서원이 있던 자리는 나무와 넝쿨로 덮여 접근하기조차 어렵다. 조그만 계곡에 우물이 있었으나 그것마저도 자연 속으로 돌아갔다.

권혁진 강원한문고전연구소장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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