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일반

[신년특집 신춘문예 당선작]광개토여왕(동화 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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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돈 벌어 올게.”

“가방에 그건 다 뭐야. 제발 적당히 좀 해 이유안!”

엄마가 태권도 가방 속에 삐져나온 고무 딱지들을 째려봤다. 태권도 가방에 차곡차곡 자리를 잡은 나의 고무 딱지들. 엄마에겐 잔소리의 대상이고 나에겐 성공의 상징이다. 나는 놀이터에 나갈 때마다 적게는 다섯 개, 많게는 스무 개도 넘는 딱지를 따온다. 고무 딱지가 하나에 천 원이니 매일 엄청나게 많은 돈을 벌어 오는 셈이다. 그런데도 돌아오는 건 잔소리 폭탄이니 정말 이보다 더 억울할 수는 없다.

“광개토여왕 납쇼. 길을 열어라~.”

며칠 전 우리 아파트에 이어 옆 아파트도 정복했다. 나는 딱지 세계의 광개토여왕이 되었다. 딱지가 든 가방을 둘러메고 놀이터로 달려갔다. 아이들이 모여 있는 곳에 태권도 가방을 툭 하고 내려놓았다. 평소 같으면 새로 딴 딱지를 구경한다고 몰려들 텐데 오늘은 시큰둥한 반응이었다. 오히려 아이들은 내가 아닌 최우주를 둘러싸고 감탄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지?' 나는 아이들 사이를 뚫고 들어갔다. 우주는 몬스터가 그려진 황금 상자를 들고 있었다. ‘앗! 설마 전설의 몬스터 황금 딱지?' 저건 문구점에도 팔지 않는 딱지였다. 우주가 상자를 열자 황금빛 딱지가 엄청난 크기를 자랑하며 모습을 드러냈다. ‘나를 가지면 세상 모든 딱지를 다 뒤집을 수 있어.' 황금 딱지가 반짝반짝 나를 유혹했다. 그 순간, 딱지를 따기 위한 수만 가지의 방법을 떠올렸다.

“최우주, 진빠 한판 하자.”

“안 돼. 가빠만 할 거야. 아빠가 마지막이라고 했어. 이거 잃으면 다시는 안 사준대.”

가빠라니… 말도 안 된다. 따서 돌려줄 바에야 안 하고 말지. 딱지가 물거품이 되어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이미 상상 속에서 내 것이 된 딱지였다. 절대 그냥 보낼 수는 없다.

“매일 남자라고 노래를 부르더니 겁나냐? 여자한테 질까 봐?”

최우주는 누나 셋과 함께 자라서 여자 같다는 놀림을 많이 받았다. 그래서 성별 이야기만 나오면 흥분했다.

“아 진짜! 이유안 당장 덤벼.”

예상대로 최우주가 아주 쉽게 걸려들었다. 상상 속에서 전설의 몬스터 황금 딱지가 내게 윙크하며 손짓했다. ‘조금만 기다려, 딱지야.'

몬스터 황금 딱지는 이름대로 전설이었다. 어설픈 최우주의 기술로도 나의 딱지들이 힘없이 뒤집혔다. 수많은 공격에도 몬스터 황금 딱지는 등짝조차도 들썩이지 않았다. 과연 최강 전투력과 방어력을 가지고 있었다. 우주는 좋아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좋아, 승부다.' 내가 가진 딱지 중 가장 강력한 딱지를 꺼냈다. 빨갛게 부어오른 엄지와 중지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가볍게 점프해 빠르게 포물선을 그리며 딱지를 내리쳤다. 일명 휘감아 내려치기. 바람과 중력을 이용하여 손가락 발가락 머리카락 끝에 있는 힘까지 모조리 끌어모은 한 수였다. 방어를 포기한 기술. 실수한다면 내가 가진 가장 강력한 딱지는 잃게 될 거다.

“따아아악!”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소리가 울려 퍼졌다. 두 딱지가 핑그르르 돌기 시작했다. 지켜보던 아이들의 침 삼키는 소리가 여기저기에서 들려왔다.

“예~~~쓰.”

뒤집힐 듯 말 듯 휘청거리던 우주의 황금 딱지가 마침내 등짝을 보이며 엎드렸다. 행운의 여신은 나의 편이었다. 우주가 입을 크게 벌린 채 말을 못 하고 눈만 껌벅였다. 이후 기운을 잃은 우주의 황금 딱지 세 개가 나의 가방 속으로 줄줄이 들어왔다.

“내 딱지…. 돌려줘 이유안. 내가 처음부터 가빠 한다고 했잖아. 엉엉.”

“무슨 소리야 최우주. 틀림없이 진빠였어. 들은 애들이 몇 명인데?”

우주가 서럽게 울었다. 매일 남자 남자 노래를 부르면서 딱지 몇 장에 저렇게 울어대다니. 우주가 더 우기기 전에 자리를 떠야겠다. 서둘러 딱지를 담고 집으로 발을 돌렸다.

“야! 너 거기 서.”

등 뒤에서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최우주의 둘째 누나 은별 언니였다. 학교에서 소문난 깡패 최은별. 우주의 손가락이 나를 가리키고 있었고, 은별 언니의 눈이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너 우주 딱지 가져와.”

“언니, 이건 제가 딴 건데요.”

언니가 매서운 눈초리로 주변 친구들을 둘러보았다. 언니와 눈이 마주치자 애들이 하나둘 우주 편을 들었다.

“누나, 우주가 가빠 한다고 했는데 유안이가 진빠 하자고 우겼어요.”

“저도 봤어요. 진빠 안 하면 여자한테 겁먹는 거라고 막 놀렸어요.”

“이유안. 이래도 안 내놔? 너 언니한테 진짜 한번 혼나볼래?”

최우주는 누나 뒤로 숨어버렸다. 여기에 내 편은 없었다. 없는 말은 아니지만, 진실도 아니었다. 억울해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렇다고 대적할 수는 없었다. 나는 있는 힘껏 최우주의 딱지들을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내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그래도 잡히면 안 되니까 냅다 튀었다.

방으로 들어가자마자 참았던 눈물이 쏟아졌다. 고개를 숙이자 엉망이 된 손이 보였다. 손가락 여기저기 까지고 쓸려서 피가 맺혀 있었다. 두 시간 동안 얼마나 열심히 했는데 그렇게 허무하게 빼앗기다니. 눈물 젖은 손에 탱탱볼이 하나 잡혔다. 하필 우주 모양의 탱탱볼이라니. 위로 힘껏 집어던졌다.

“우주에서 가장 비겁한 최우주!”

천장에서 튕긴 탱탱볼이 빠르게 내 이마로 떨어졌다. 이렇게 재수가 없을 수도 없다. 우주도 비겁했고, 은별 언니도 비겁했고, 남자애들도 비겁했고, 저 탱탱볼도 비겁했다. 마음속에 있던 화산이 폭발해서 눈물로 쏟아져 내렸다. 두고 봐, 비겁한 녀석들. 앞으로는 여왕이 아니고 광개토마왕이 되어주겠다.

다음날부터 딱지를 향한 나의 집착이 시작됐다. 태권도 가방이 가득 차 임시 가방을 하나 새로 마련했다.

“좋아. 다음 덤벼.”

“야, 다 따갔으면 몇 개는 돌려줘.”

“흥! 웃기시네. 그건 내 맘이지.”

전에는 다 따면 몇 개는 돌려주었지만 이젠 어림없다. 비겁한 녀석들에게 자비는 없다. 일주일 사이 임시 가방도 빠르게 채워졌다. 오늘은 더 덤빌 아이들이 없는 것 같았다. 가방 두 개를 양쪽으로 둘러메자 아이들이 부러운 듯 바라봤다. 이대로라면 문구점보다 내 딱지가 더 많아질 기세였다. 종일 딱지를 치느라 퉁퉁 부은 손가락을 보니 우주의 딱지가 생각났다. 최우주는 그날 이후 놀이터에 코빼기도 비추지 않았다. 언젠가 최우주의 딱지를 모조리 손에 넣는 상상을 하며 집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나랑 딱지 붙을 사람 없어?”

아이들은 눈치를 보며 나를 피했다. 학교에서 우연히 마주쳐도 학원 가야 한다, 숙제 해야 한다, 이런저런 이유를 댔다. 딱지를 치던 아이들이 사라질 때마다 신나던 마음도 조금씩 작아졌다. 오늘도 놀이터에는 꼬맹이들만 있고 딱지를 치는 애들은 없었다. 놀이터에서 혼자 딱지를 꺼내 쳤다. 맛도 없는 사탕을 꾸역꾸역 먹는 기분이었다.

‘딱지를 좀 돌려줄 걸 그랬나.' 혼자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데 저 멀리 최우주가 보였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모습이 퍽 수상해 보였다. 나는 재빨리 미끄럼틀 뒤로 몸을 숨겼다. 우주는 잠시 놀이터 쪽을 살피더니 아파트 뒤쪽으로 사라졌다. 나는 서둘러 딱지를 챙겨 들고 우주가 사라진 방향으로 따라갔다. 아파트 모서리를 돌자 딱지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가 나는 쪽으로 가 보니 핑계를 대고 사라진 애들이 죄다 모여 있었다. 최우주도 그곳에 있었다.

“이 거짓말쟁이들아. 여기가 학원이야? 이게 숙제 하는 거야? 나 왕따시키고 재밌냐?”

눈물이 쏟아질 거 같았다.

“왕따라니! 그런 거 아니거든.”

“아니면 이건 뭐야? 나 따돌리고 여기서 뭐 하는 건데?”

“너는 따면 안 돌려주니까 그렇지. 이제 집에서 딱지도 안 사주는데.”

“그럼 네가 이기면 되잖아.”

내 말에 불만들이 터져 나왔다.

“지고 싶어서 지는 사람도 있냐.”

“맞아, 진빠 안 하면 약하다 놀리고, 따면 하나도 안 주고.”

조용하던 아이들까지 한꺼번에 덤벼들 듯 말하니까 당황스러웠다.

“내가 딴 거 내 맘대로 하는 게 뭐가 나빠. 너희들끼리 실컷 해.”

코웃음을 치며 돌아섰다. 예전에는 풍선처럼 가볍던 딱지 가방이 오늘은 왜 이렇게 무거운 걸까. 따악. 뒤에서 딱지 치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자꾸만 걸음이 멈췄다. 가방 속에 꾸역꾸역 들어 있는 딱지들을 내려다봤다. ‘그냥 조금 돌려줄까?' 화가 나긴 했지만 놀이터에서 혼자 놀 생각을 하니 자꾸 마음이 흔들렸다. 가방에서 딱지 하나를 꺼냈다. ‘앗! 이건 공격력이 센 딱지잖아.' 다른 딱지를 꺼냈다. ‘이건 방어가 좋은 딱진데….' 딱지를 쥐고 놓고를 반복하다가 돌아섰다. ‘안 돼! 어떻게 모은 딱지들인데.'

그날 이후 애들은 다시 놀이터에서 딱지를 쳤다. 며칠 동안 못 본 체하며 지나쳤지만, 마음은 종일 놀이터에 가 있었다. 우울한 기분으로 현관문을 열자 딱지 가방이 멀뚱히 놓여있었다. 놀이터에서는 성공의 상징이었는데 저곳에 있으니 그냥 짐짝이었다. ‘딱지 가게를 차릴 것도 아닌데….' 한참 고민하다가 딱지 가방을 메고 놀이터로 향했다.

놀이터에 도착하자 아이들이 웅성거리고 있었다. 아이들 사이에 덩치 좋은 남자아이가 서 있었다.

“무슨 일이야?”

“저기 저 형이 우리 딱지 다 따갔어.”

말을 하던 아이가 울음을 터트렸다. 아이들 말로는 옆 아파트에 새로 이사 온 형이라고 했다.

“저랑 진빠 한판 하죠?”

내 말에 덩치가 코웃음을 쳤다.

“딱지 다 잃었다고 울지 마라.”

나도 같이 코웃음을 날렸지만, 딱지를 고르는 손에 땀이 고였다. 그때 뒤에서 최우주가 딱지 하나를 내밀었다. 전설의 몬스터 황금 딱지였다.

“다 잃고 하나 남았어. 이유안 파이팅.”

최우주가 작게 속삭였다. 나는 최우주가 내민 딱지를 손에 들고 덩치 앞으로 갔다. 아이들이 숨죽이며 우리를 지켜봤다.

“따악~.”

딱지 소리가 놀이터에 크게 울려 퍼졌다. 덩치는 모서리를 공략하는 칼 치기나 바람의 힘을 이용한 바람 치기 등 온갖 기술을 보여주며 황금 딱지를 공격했다. 황금 딱지가 움찔움찔하며 멈출 때마다 휴~ 하고 안심하는 아이들 소리가 들렸다. 땀을 한번 닦고 딱지를 쥔 손에 힘을 줬다. 최우주와 아이들을 한번 쭉 둘러본 후 덩치의 딱지에 눈을 고정했다. 온몸의 힘을 손으로 끌어모은 뒤 바람을 가르고 덩치의 딱지에 힘껏 내려쳤다. 착지하다 무릎이 바닥에 쿵 하고 부딪쳤다.

“우와~!”

아이들이 환호하는 소리가 들렸다. 드디어 덩치의 딱지가 등을 보이며 뒤집혔다. 덩치는 딴 딱지들로 계속해서 도전했다. 놀이터에 딱지 소리가 오랫동안 울려 퍼졌다.

“오빠, 앞으로 우리 아파트에서는 딱지를 따면 반은 돌려줘야 해요.”

결과는 나의 완승이었다. 나는 덩치가 보는 앞에서 딱지를 잃은 주인들에게 반을 돌려줬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네가 뭔데 이래라 저래라야.”

딱지를 모두 잃은 덩치가 씩씩거리며 말했다.

“유안이가 우리 아파트 광개토여왕이에요. 당연히 들어야죠.”

최우주가 한쪽 눈을 찡긋했다. 아이들이 너도나도 엄지손가락을 들어 올리며 그 말에 맞장구를 쳤다. 그 모습에 웃음이 터졌다. 그야말로 진정한 광개토여왕이 된 기분이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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