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일반

문단 밖의 낭인, 울타리에 머물지 않고 역사의 격랑기에 몸담아

[역사속의 강원인물, 그들이 꿈꾼 삶]

초허 김동명 '카인의 말예(末裔)', 그 쓸쓸한 삶의 그늘

- 엄창섭 시인이 말하는 '초허 김동명의 인생'

강릉 사천서 독자로 출생

궁핍한 생활로 중학교 17세 입학

시집 한권 읽어본적 없던 그

1923년 '개벽' 통해 등단

제도권 구속 원치 않은 까닭에

독실한 기독교인,

망국의 통한을 읊은 민족시인,

교육자와 정객,

그리고 정치평론 열어 보이며

분망한 삶의 거적 남겨

그의 가족사는 불행으로 점철

1947년 4월 단신으로 월남

첫번째는 혼인 병사, 두번째는 상처,

그리고 다방 마담 출신과 재혼

생후 15일 된 딸은 입양 보내

가난과 병고에 시달리다

1968년 1월 느꺼운 삶 마감

2010년 10월10일 초허의 봉안식

서울에 안치된 유해 모셔와

102년만의 귀향이니 셈

■'사기막' 물소리, 그 유랑의 시작

어렸을 때, 어머니의 무릎을 베고, 혹은 '코쿨' 앞에 마주 앉아 유별나게 긍지와 자존심이 강한 어머니로부터 유충렬전, 조웅전, 장화·홍련전, 심청전 등 많은 이야기를 들었지만, 그 가운데서도 슬프기로는 “영영 가버린 어머니를 찾아, 슬피 울며 타박타박 걸어가는 타박 女의 이야기”가 어린 김동명의 기억속에 으뜸으로 자리해 있다. “아아, 타박 여의 울음소리, 타박 女의 뒷모습! 이것은 바로 내 눈물의 옛 고향이라”는 그의 감회는, “강보에 싸였을 때부터 내 기억은 물소리에서부터 시작된다. 방안에 앉아서도 그윽이 들려오는 물소리! 이건 내가 사파에 와서 들어 본 자연의 음악이었는지도 모른다”라는 아련한 기억 흔적과 함께 잔잔한 감동을 불러주는 맑은 영혼을 촉촉이 적셔주는 물의 흐름처럼 가슴 저려오는 전별(餞別)과 운명적인 유랑(流浪)을 뜻하기에 산문집 '모래 위에 쓴 낙서'처럼 초허의 서러운 인생의 여정, 곧 '떠남의 미학'은 타고난 사주팔자처럼 또 그렇게 시작될 수밖에 없었으리라.

■망향의 꿈, 102년 뒤 향리의 품에

백두대간의 허리를 영동고속도로가 관통하고 있지만, 물안개에 젖은 대관령의 정상은 해발표고 832m이다. 예부터 삼청(三靑)의 고장인 강릉은, 천년의 시향(詩鄕)으로 '호수와 파초의 시인'인 초허의 수필집 '세대의 삽화(揷話)'처럼 다양한 삶을 마감한 초허(超虛) 김동명의 출생지다. 그는 궁핍한 생활로 14세에 들어가는 중학교를 17세에 입학해 두 학년을 월반하여 3년 만에야 영생중학을 졸업하고 기구한 사주팔자를 자탄도 많이 했지만, '개벽'(1923년)에 '당신이 만약 내게 문을 열어 주시면'을 발표하며 문단에 데뷔했다. 그는 당시의 문인들과는 달리 제도권에 구속되기를 원치 않은 까닭에 독실한 기독교인, 망국의 통한을 읊은 민족시인, 교육자와 정객, 그리고 정치평론을 열어 보이며 분망한 삶의 거적을 남긴 예감의 지도자였다.

초허의 봉안식이 2010년 10월 10일, 사천면 노동하리 낮은 산자락에 위치한 종중영원에서 거행됐다. 경주김씨 수은공파 강릉 사천종중은 서울 망우리 문인공원묘지에 안치된 유해를 모셔왔다. 102년 만의 귀향인 셈이다. 문화의 지역구심주의가 조망되는 현실에서 '김동명, 그 쓸쓸한 삶의 그늘'을 확인하는 작업은 의미가 크다. 특히 강릉시에 의해 그의 생가터에 문학관 건립이 2012년 12월경 완공하게 될 사실은 바람직하다. 위대한 시인에게 '시대적 상황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이 물음에 답하기는 어렵지만, 그가 취해야 할 태도는 극히 힘겨운 행위이다. 자유로운 영혼으로 바람처럼 질주하며 평생을 유랑했던 그는, '일제 강점기→자유당 부패 →군사독재'라는 시대상황에 대응하며 격변하는 현대사에 몸을 던져 현실 개혁을 실행한 인물로서 국어에 관심을 지닌 지사적 실체다.

■어머니, 영원한 삶의 본향

초허는 강릉시 사천면 하노동리 54번지에서 경주김씨 제옥(濟玉)과 평산신씨 석우(錫愚) 사이에서 독자로 출생했다. 자부심이 강하고 냉정한 성품으로 대언장담을 즐기는 모친은 무학이었지만 빈궁한 생활에서도 아들이 “강릉군수가 되어야 한다”는 기대로 각별한 교육열을 발휘해 노동리의 서당에서 한학을 익히게 한다. 1908년 가족이 함경북도 원산으로 이주하게 된 것도 아들에게 신교육을 받게 하려는 모친의 의지였다. 1921년 함흥에서 영생중학을 졸업한 이후에도 한권의 시집이나 소설을 읽어본 기억조차 없는 초허 자신이 “문학에 뜻을 두기는 1923년 무렵”이라고 밝혔듯이, 일본 입교대학 출신으로 '조광사'의 기자였던 현인규와 교우하면서 비로소 문학에 흥미를 지니게 되었다. 1923년 '개벽'을 통해 등단하고, 1930년에 시집 '나의 거문고'를 간행하면서 그는 자신의 시편에 일제 강점기의 사회현실을 반영해 현실상황에 대처했다. 그는 역사의 격랑 기에 몸담으면서 문단이라는 울타리 속에 머물기를 원치 않은 탓에 정객들에게는 '문단 밖의 낭인으로' 소외됐고, 일부의 문객들에게는 '카인의 말예'로 인식된 탓에 문단에서 비중 있게 다뤄지지 못했다.

■시인의 눈부신 이름, 모국어의 사랑

공습경보 아래서 일제의 강압이 점차 극심했던 1938년 무렵, 초허 자신이 지역 유지들에 의해 건립된 흥남 서호진의 동광학원 원장으로 민족혼을 일깨운 시간대이자 망국의 통한을 고독한 심경의 시적 형상화로 일관한 시간대였다. 그는 함남 서호진에 거처하며 조선어가 말살된 상황에서도 민족의 혼인 우리의 언어로 1943년까지 시 쓰기에 몰두했다. 그는 일본의 청산학원 신학과와 일본대학 철학과를 졸업한 지식인으로서, 창씨개명과 일문창작을 거부한 그의 시문학에 대한 조명은 충직한 강원인의 자긍심을 일깨워주는 작업에 해당한다. 민족 시인으로서 망국의 울분을 토로했고, 강직한 민족의식은 놀랍게도 '파초 해제'와 '술 노래 해제'를 통해 쉽게 확인된다.

한편, 격랑의 세기에 몸담으며 청빈을 갈망했던 그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마:8)”라는 성경 구절을 좌우명으로 삼았다. 1947년 4월의 단신 월남도 안쓰럽지만 그의 가족사는 불행으로 점철된다. 첫 직장인 동진소학교 시절 하숙집 딸로 영생고보 출신의 전형적 동양여성인 지정덕과 혼인은 병사로 끝났으며, 수필 '전환 180'처럼 “굴욕, 그 모멸감, 그 참담한 고전 그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치가 떨린다” 당시의 심정을 회고하였듯 42세 되던 해에 이대 음악과 출신인 이복순과의 결혼은 상처(喪妻)로 이어지고, 1960년에는 다방의 마담 출신 하윤주와 재혼을 하였다. 이처럼 비극적인 운명에서도 생후 15일 된 딸 혜숙을 박씨가(家)로 입양 보낸 가슴 저린 참담한 기억은 하늘이 무너지는 비통함에 견줘진다.

■유랑의 아득함, 영혼의 치유(Healing)

자녀교육에 세심한 관심을 형상화 한 '아가의 말'이나 '아가의 꿈', '아가의 날' 등은 월정(月汀)이의 이름 풀이가 '아름답고 깨끗함, 영원한 것의 참된 모습, 노래의 시작'으로 확인되듯 사랑하는 딸의 성장 과정을 그려간 일종의 육아일기다. 또 '우리말'은 우리의 정신적 자산인 언어의 상실에 따른 자성과 미래의 염원, 그리고 결의를 다짐하는 내용을 의미한다. 조국 상실로 인해 “석죽화(石竹花) 그늘 밑에 이슬(옛 이야기)”처럼 모두로부터 소외될 존재가 되어버릴 자신을 예감한 그는, 민족에 대한 애절한 사랑을 '수선화'에 담아 노래했다. 냉엄한 역사의식과 그만의 비장감은 '그대를 따라 저 눈길을 걷겠노라'며 자연과의 일체감을 호소한 의지의 표명으로 고통의 세계를 감내하겠다는 화자의 동일한 신념이다.

이 같은 정황에서 장남인 김병우의 “일어사용을 거부하며 붓대를 꺾어버립니다. 그는 일제 치하에서 굴복을 거부하며 저항의 세계를 보내야 했고, 광복 후에는 독재에 맞서서 필주(筆誅)의 붓을 휘두르게 한 것입니다” 부친에 대한 그의 회상은, 날(刃) 푸른 선비정신의 품격과 민주주의의 수호자로서의 풍모를 일깨워준 보기다.

'정치는 제2의 시(詩)'임을 역설하며 1960년에 이화여대의 교수직을 사임한 뒤, 정객으로 변신한 그는 자신의 신념을 참여적인 시적 형상화로 표출했다. 또 “내 연륜의 선물인 '고혈압'을 훈장삼아 차고 늙음의 대도(大道)를 성큼성큼 걸으리라”(자화상) 처럼 가난과 병고에 시달리다 1968년 1월21일 느꺼운 삶을 마감했다. “비록 날이 새이면 그대가 떠나기가 바쁘게 다시 돌아오는 그대의 말방울 소리를 기다릴 터이니”(손님) 동해의 해풍을 전신으로 맞으며 사천면 7번 국도변의 '슬피 울며 타박타박 걸어가는 타박여'와는 달리 주인의 귀향을 갈망하는 김동명 시비에 각인된 “한 시대의 준엄한 증언이기도 한 필경 궁핍한 땅의 한 시인이 그리는 조국의 모습이 가져온 애국의 시작(詩作)이며 창조의 시업(詩業)이다.” 이처럼 그의 약력은 의미심장한 기록물이다.

*시인 엄창섭씨 프로필

■강릉 출생

■성균관대 대학원 졸업(문학박사)

■시문학 등단

■한국시문학회 회장, 한국문예비평학회 부회장, 심연수시 인 선양위원회 위원장, 국제펜클럽한국본부 이사 등 역임

■관동대 교수, 교무처장, 대학원장 역임

■한국현대시인협회상, 김동명문학상, 강원도문화상(문 학), 강원펜문학상, 관동문학상, 강릉예술인상, 문교부 장관상, 국무총리 표창 등 수훈 다수

■시집- '바다와 해', '생명의 나무','다시 비탈에서' 등

■저서- '문화인식의 현상과 이해', '문예사조론', '김동명 문학 연구', '현대시의 현상과 존재론적 해명'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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