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제

[강원의 맛 지역의 멋]그곳엔 ‘육지와 바다'가 함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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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슐랭 가이드' (4) 인제전통시장

◇인제전통시장에서 장을 보고 있는 주민들. 사진=신세희기자

6·25전쟁 이겨낸 주민 땀 서린 삶의 터전

영서·영동 문화 맞닿은 경계지역 매력

황태·더덕구이…숙성된 융합의 맛 풍성

나이를 묻는 말에 그는 옛 기억을 더듬었다. 1950년 6월의 인제군 상남면. 그의 기억은 그때부터 시작된 듯했다.

“내가 일곱 살 때 전쟁이 났어. 그때 동네에 큰 낭구(나무)가 있었지. 난리가 나면 그 밑으로 숨어들었던 기억이 나. 동네에 공산군도 들어오고, 국군도 들어오고 그랬어.” 인제 토박이라는 그에게 유년 시절은 공포의 기억이었다. 군인들이 번갈아 가며 내려오는 사이, 마을에는 어김없이 불꽃이 터졌고, 주민들은 엄혹한 현실 속에서 살아남는 법을 일상으로 받아들였다. 그들은 전쟁이 끝나면 그때 그 과거로 온전히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옅은 희망을 품었으리라. 하지만 돌아오지 못한 이웃들과 갈라진 마을을 남겨둔 채 시간은 속절없이 흘렀다. 현대사의 틈바구니에 끼인 삶이다. 아찔한 첫 기억의 일곱 살 꼬맹이는 어느덧 산수(傘壽)를 바라보는 나이가 됐다.

복잡하고 어두웠던 한국 현대사의 경계와 틈. 그 사이에서 살아남은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인제에 있다. 전쟁이 났을 때 가족과 이웃을 잃고, 휴전 이후에도 남북관계가 경색될 때마다 긴장 속에서 숨죽여 온 사람들이다. 인제군 인제읍에 있는 인제전통시장은 그런 이들의 삶의 터전이 돼 준 곳이다. 역사는 눈길 한번 준 적 없지만 주민들은 악착 같은 생활력으로 삶을 이어 갔고, 마을을 다시 세웠다. 전쟁 직후 불타버린 밭을 일궈 곡식을 수확했고, 그렇게 키운 쌀 한 톨, 팥 한 알을 가지고 이곳 시장에서 삶을 이어 갔다.

쌀과 팥은 다시 식구들의 옷이 되고 집이 됐다. 젖먹이를 안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시장에 나와 물건을 팔았던 아낙네들, 인제중앙시장은 이들이 키운 치열한 삶의 현장이기도 하다. 지금도 이곳에서는 직접 농사지어 만든 팥죽이며 콩탕, 비지를 가지고 나와 파는 여성 상인들을 만나볼 수 있다.

제대로 된 기록 한 줄 남아있지 않지만, 난전에 불과했던 시장을 지금의 모습으로 만들고, 불탄 집들만 가득했던 전쟁 직후의 인제를 먹여살린 참 주인공들이다.

인제전통시장의 또 다른 묘미는 다양한 지역에서 실어 나른 다채로운 품목들이다. 인제는 위로 군사분계선과 철원군·양구군·고성군을 올려다보고, 동쪽으로는 강원 영동지역과 접해 있다. 인제군 자체는 춘천, 양구, 홍천 등과 함께 강원 영서에 속해 있다. 이처럼 많은 지역과 경계를 맞대고 있어 시장에도 볼거리가 가득하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손님들을 반기는 황태, 고등어와 도치, 갈치는 영동지역의 수산시장을 생각나게 하고, 안쪽에서 판매하는 더덕은 강원 영서 산골의 매력을 뿜는다. 춘천은 물론 홍천, 양구보다 시장 규모가 작은 인제가 이토록 오랜 세월 사랑을 받는 이유는 이런 ‘경계지역'의 매력에 있다. 상인들 역시 인제지역의 5일장과 홍천, 양구를 돌며 물건을 판매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줄곧 평화를 갈망해 온 인제는 여러 분쟁과 현대사의 불행 속에서도 꿋꿋이 현재를 일구고 미래를 꿈꿨다. 추위 속에서도 다정함을 잃지 않고 따뜻한 음식을 나눠 온 겨울 마을 사람들이 이제 지역의 색다른 매력을 알아 줄 손님들을 기다린다.

인제=박서화·이현정기자 / 편집=이화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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