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춘추칼럼]담을 넘는 사람들

심윤경 소설가

어린 시절 나를 생물학의 길로 이끌었던 영웅들이 있었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곤충들의 생태에서 마법 같은 이야기들을 뽑아내던 장 앙리 파브르와 캐나다 대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야생 늑대들의 삶과 죽음을 기록한 어니스트 시튼이 끼친 영향은 어마어마했다. 이제야 고백하지만 사춘기 이전까지 나의 숨겨진 자아 정체성은 늑대였다. 내가 네 발로 기어다니거나 방구석에 코를 대고 킁킁거리는 습관이 있었던 것은 내가 늑대였기 때문이었다. 나는 어둑한 화장실에서 낯선 침입자 늑대를 물리치고 마루 아래 숨겨진 덫을 찾아내고 장롱에 숨겨둔 어린 늑대들을 보호하며 혼자만의 늑대 세계에 거주했다.

청소년기에 새로이 찾아낸 영웅이 템플 그랜딘이었다. 템플 그랜딘은 자폐인으로서 축산 현장의 관행과 구조를 낱낱이 파악하고 동물이 고통이나 두려움 없이 죽을 수 있는 동물친화적 도축 시스템을 개발했다. 그녀의 통찰에 의하면 죽음 자체는 동물에게 큰 공포의 대상이 아니다. 그들은 미래를 예측하지 않는, 오로지 현재에 충실한 존재들이기 때문에 도축장에서 그들을 기다리는 큰 칼의 존재에도 두려움이나 비애를 느끼지 않는다.

보통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한 동물의 사고를 한눈에 꿰뚫고 기존 건축 문법과 전혀 다른 새로운 동선 구조를 설계할 수 있었던 템플 그랜딘의 위대한 업적은 바로 그가 자폐인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책의 내용이나 경험한 장면을 사진을 찍듯이 기억에 저장해 곧바로 찾아보고 기억 속의 구조물을 자유자재로 줌인 줌아웃 하며 360도 입체적으로 둘러볼 수 있는 사진기억법(Photographic memory)은 흔히 천재의 한 표상으로 여겨지기도 하는데, 이것이 바로 ‘동물의 기억법''이라고 템플 그랜딘은 설명한다. 템플 그랜딘과 같은 자폐인은 동물과 비슷한 방식으로 영상형 사고를 하기에 남다른 기억력을 갖기도 하고, 보통 사람과는 다른 사고방식과 행동을 보이게 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능력을 최대치로 활용한 자폐인 변호사와 그를 둘러싼 인물들의 모습을 보여준 한 드라마가 화제다. 주인공 배우는 탁월한 연기력으로 애매한 시선과 뻣뻣한 동작, 다소 기계적으로 들리는 말투 등을 더할 나위 없이 사랑스럽게 표현해내며 이 드라마의 인기몰이에 핵심적인 역할을 해냈다. 이 드라마와 함께 36년만에 후속편이 제작됐다고 화제를 모은 인기 영화가 오래된 기억을 자극해 나는 ‘레인맨''도 다시 찾아보았는데, 주연을 맡은 두 명배우는 천재적 기억력을 가진 자폐인이라는 이색적인 존재를 중심으로 인간이라면 누구나 느낄 수 있는 소외감과 고립감, 자폐장애라는 극도로 제한된 여건 속에서도 따뜻하게 연결되는 사랑의 감촉들을 보여줬다.

자폐인이 보여주는 기계적이고 폐쇄적인 표현과 반응 양식들 때문에 그들은 흔히 세상에 높은 담을 쌓고 세상과 소통하지 않으려 하는 사람들로 여겨진다. 하지만 자폐인들에게는 그들의 방식으로 세상과 소통하고자 하는 욕구와 의지가 있다. 높은 담은 자폐인들이 일방적으로 쌓은 것이 아니다. 익숙한 보통스러움과 다른 낯선 감촉을 쉽사리 적대적으로 해석하고 배척하려 하는 우리 비자폐인, 비장애인 쪽에서 먼저 더 높은 벽을 쌓았다. 어떤 천재성을 내세우지 않더라도, 우리는 모두 지구 위에서 함께 살아가야 하는 존재들이다. 우리 모두에게 지워진 공존의 책임을 오늘도 잊지 않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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