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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과거사-동해안 납북어부 간첩조작사건]두번 납북 후 간첩 조작된 아버지…“반드시 명예 찾아드리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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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과거사-납북귀환어부 간첩조작사건](1)
속초 김해자씨 부친 1968년과 1972년 고기잡이중 두 차례 납북
귀환 후 모진 고문과 폭행, “이제는 간첩 누명 벗겠다”

납북귀환어부 간첩조작사건은 1960~1980년대에 동해안과 서해안에서 집중적으로 발생했다.

고령이 된 피해자들은 명예회복에 대한 기대조차 갖지 못한 채 숨졌고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피해 자녀와 가족들은 여전히 보이지 않는 연좌제의 덫으로 인해 고통받고 있다. 지난해 강원일보의 특별기획 연속 보도 이후 동해안의 피해자들과 시민사회가 힘을 모아 진실규명 및 피해자들의 복권, 특별법 제정에 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는 연말까지 전국적으로 납북귀환어부 피해자들의 진실규명 신청을 받는다. 어두운 과거사를 다시 쓸 골든타임이다. 창간 77주년을 맞은 강원일보는 지난해에 이어 납북귀환어부 사건의 진실을 다시한번 국민들에게 알린다.

◇지난 8일 속초 중앙시장에서 만난 납북귀환어부 피해자의 유족 김해자(65)씨.

“우리 아버지는 고기잡이 중에 두 번 납북됐어요…우리가 도대체 왜 간첩입니까”

김해자(65·속초)씨의 아버지 김달수씨는 1968년 신강호, 1972년 삼창호의 선원으로 고기잡이에 나섰다가 두 번이나 납북된 기구한 삶을 살았다.

김씨는 아버지의 이야기를 하고나면 몸과 마음의 상처가 도지고 눈물이 멈추질 않는다며 인터뷰를 한사코 사양했다. 두달 간의 설득 끝에 두 번 납북 후 돌아와 모진 고문에 시달렸던 납북귀환어부 김달수씨와 가족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두 번의 납북, 부서진 일가족의 삶=1968년과 1972년 아버지가 두번이나 납북됐을 당시 김해자씨는 국민학생(초등학생)이었다. 귀환 후 모진 수사를 받았던 김씨의 아버지는 방 안 요강에 피를 수차례 토했다. 김씨는 “고기잡이 중 납북된 이후 수사를 받은 아버지는 야윈데다 일어나지도 앉지도 못한 채 누워만 있었고 엄마가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며 “병원에 갈 돈 조차 없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11살이었던 김씨마저 공사현장을 찾아다니며 일해야 할 정도로 가세도 기울었다. 김씨의 오빠 역시 중학교 2학년때 돈을 벌기 위해 오징어잡이 배에 올랐다.

어린 나이였던 김씨는 가족을 부양하지 못하고 누워 있는 아버지를 원망했다.

김씨는 “우리 아버지는 두 번을 북에 잡혀갔다 돌아오신 후 밤새 앓고 치아는 다 빠지고 귀는 한쪽이 먹고, 밥도 죽을 쒀서 드셨다”며 “우리는 너무 고생이 심한데 아버지는 돈을 안 벌으니까 원망스러웠다”며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이제 아버지에 대한 원망은 연민과 그리움, 회한으로 변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일절 말이 없었지만 최근 같은 피해를 겪은 납북귀환어부 피해자들을 만난 후 아버지가 수사기관에서 모진 구타와 고문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됐다.

김씨는 “두번이나 고초를 겪은 아버지에게 너무 미안해요. 저는 이제 가족 사진을 옆에다 두고 ‘엄마 아버지 사랑합니다’라고 항상 말해요” 라면서 감정을 주체하지 못했다.

◇납북귀환어부 피해자의 유족 김해자(65)씨가 강원일보 취재진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지속된 감시, 피해의 대물림=김씨의 가족은 경찰의 삼엄한 감시 속에 살아야했다. 김씨는 지긋지긋한 수사기관의 감시를 생각하면 지금도 몸서리를 친다. 김씨는 “아버지 살아계실때 경찰들이 노상 찾아왔다. 경찰들이 왔다가면 아버지는 밤잠을 못 주무시고 힘들어했다”면서 “오죽하면 내가 어린 나이에 바가지로 물을 뿌리고 문을 쾅쾅 닫으며 우리 집에 오지말라고 화를 냈다”고 말했다.

결혼 후 공무원이었던 김씨의 남편까지 진급에 불이익을 받는 등 연좌제의 족쇄는 가혹했다. 결국 김씨는 시댁의 미움을 받는 등 결혼생활은 순탄치 않았고 이혼의 아픔을 겪었다. 어릴 적부터 배에 올랐던 김씨의 오빠 역시 혼자 어렵게 생활하고 있다.

김씨는 이제라도 아버지의 억울함을 풀어드리고 가족의 명예를 되찾기 위해 같은 경험을 갖고 있는 지역의 피해자들과 함께 재심과 국가에 대한 손해배상 등을 청구할 생각이다. 그러나 잠시도 악몽같은 트라우마를 다시 떠올리기 두려운 오빠는 이를 만류할 정도다.

김씨는 “망망대해에 나가서 북한에 납치되고…가족이 있는 고향에 돌아오기 하루하루 힘겨웠을텐데 여기와서도 가혹행위를 당하고 매를 맞으면서 전혀 보호받지 못했다” 며 “아버지와 같은 피해자들을 만나보면 건장했던 남자가 엉엉 울면서 당시를 떠올리는 모습에 너무나도 무서웠다” 고 말했다.

■50년 한(恨) 풀겠다=“요즘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있어요. 한 사람 인생뿐 아니라 자식들 인생까지 다 있는데…아버지는 간첩, 나는 간첩의 딸이라는 혐의를 반드시 벗고 싶어요” 김씨는 억울함을 벗는 것을 남은 삶 소망이라고 했다. 김씨는 최근 아버지가 두번째 납북됐던 삼창호 동료 선원의 유족을 만났다.

아버지와 함께 납북됐던 선원의 부인이 마침 이웃에 살고 있었다. 50년의 아픈 기억을 공유하고 있는 두사람은 처음 만난 자리에서 하염없이 눈물을 쏟았다.

다른 납북귀환어부 피해자와 가족들도 김씨 가족의 삶과 다를 바 없었다.

“(동료 선원의 부인이)아저씨와 연애할 때 납북됐다고 그러시더라. 아들이 일을 할 수 없으니 시어머니가 대신 일하고 본인도 40년을 식당 일을 하며 3남4녀를 공부시키고 고생을 너무 많이 하셨다고…”며 “우리 아버지처럼(납북된 일이나 수사받으며 가혹행위 당한 일) 일절 말을 안하더래요. 부인의 손발이 다 휘어지고 다리도 못 쓰고 허리도 못 쓰고 사람은 너무 너무 작은데…우리 엄마를 보는 것 같아서 너무 많이 울었다”며 다시 한번 눈물을 적셨다.

그는 반드시 아버지와 자신을 명예를 회복하겠다고 다짐했다.

김씨는 “내가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재심을 해서 아버지가 무죄를 받도록 하겠다. 왜 우리가 간첩인가요!(눈물) 내가 하지 못하면 누구도 대신 할 수 없는 일이다. 나는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한점 부끄러움 없이 알뜰하게 살아왔다. 그동안 숨죽여 살아왔지만 이제야 이렇게 눈을 떴다” 고 말했다.

이현정·최기영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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