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일반

"아직 남아있는 낙인…명예 회복으로 아버지 꿈 이뤄드릴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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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과거사-납북귀환어부 간첩조작사건](3)
군산 어부 서창덕씨 1967년 조기잡이 중 납북
아들 진석씨 "동해안처럼 서해안에도 단체 필요"

◇납북어부 피해자 고(故)서창덕씨의 아들 서진석씨가 취재진을 만나 이야기 하고 있다. 그는 "똑같은 법인데 성향이 다르다고 해서 판결이 달라지면 안 되지 않나. 법은 하나인데 왜 달라지는 지 모르겠다. 판례에 따라서 판결을 해 주셨으면 좋겠다. 그게 전부"라고 말했다. 군산=신세희기자

납북귀환어부 간첩조작사건은 동해안과 서해안을 가리지 않고 일어났다. 1950년 6·25전쟁 이후부터 1980년대까지 우리 해역에서 조업 중인 어민들은 북한의 경비정에 납북됐다 귀환한 후 간첩으로 조작됐다. 동해안의 경우 공론화 과정을 거쳐 지난해 피해자 시민모임이 결성됐고 강원도는 피해자 명예회복과 지원에 대한 조례를 제정했다. 서해안에서도 동해안처럼 피해자 단체를 만들고 목소리를 모아 내려는 이가 있다. 납북귀환어부 고(故) 서창덕씨의 아들 서진석(41)씨다. 지난 3일 서씨가 아버지를 모신 전북 군산의 한 납골당에서 그를 만났다. 서진석씨는 2018년 돌아가신 아버지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그는 개인이 국가에 대항해 목소리를 내는 일이 너무 힘들다고 말했다.

■아버지 서창덕씨의 기구한 이야기=군산의 작은 섬 개야도에서 태어난 서창덕 씨는 부모님이 배를 타다 돌아가신 후 동생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14살 때부터 배에 올랐다. 1967년 19살의 나이에 조기잡이 배 승룡호를 타고 연평도에 갔다가 북에 납치됐다. 124일간의 납북 끝에 인천을 거쳐 군산으로 귀환했다. 군산경찰서에서 오랜 시간 조사를 받고 기소 유예로 풀려났지만 1969년 재차 군산경찰서로 잡혀갔다. 고문 끝에 반공법, 수산업법 위반으로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조심스럽지만 가족과 단란하게 살아가던 그는 1984년 다시 전주 보안대에 붙들려갔다. 수십일간의 극심한 고문 후에 '북한에 첩보를 제공해 왔다'며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가 추가됐다. 이 일로 징역 10년 형을 선고받았고 7년이 넘는 수감생활을 했다.

■망가져버린 가족들의 삶=가족들의 삶은 이후 엉망이 됐다. 아들 서진석씨는 "어머니에게 아버지의 행방에 대해 물었지만 해외로 돈을 벌러 갔다고만 했다. 그런데 동네 파출소 게시판에 간첩을 잡았다는 내용이 붙었고, 동네에서 사람 취급도 못 받게 됐다"고 회고했다. 그는 "어린 나이에도 제 뒤에는 항상 두 명의 경찰들이 따라다녀 감시했다. 선생님은 선생님대로 간첩 자식이라고 때리고 애들은 '빨갱이 자식'이라고 때렸다"고 말했다. 서진석씨의 어머니는 다방에서 설거지를 하며 할머니와 자식들까지 다섯 식구를 먹여 살리기 위해 애썼지만 서씨를 따라다니던 남자들은 그의 어머니도 끈질기게 쫓았다. 그들은 어머니의 일터에 '간첩 마누라'를 왜 일하게 두냐며 찾아왔다. 서씨는 "어머니가 계속 다니던 일터를 그만두고 다른 곳으로 옮겨도 또 쫓아왔다. 그들은 어머니더러 이혼을 하면 안 쫓아다니겠다고 말했다. 어머니는 5~6년 아버지를 기다리시다가 정말 어쩔 수 없이 이혼한 것"이라며 억울해했다. 자상했던 그의 아버지는 석방 후 난폭해졌다. 술로 밤을 지샜다. 서씨는 “나는 나쁜 길로 빠졌다. 나쁜 친구들과 어울렸다. 수감생활을 하고 나온 아버지에게 간첩 아버지를 둔 적 없으니까 보지 말자고 하고 더 이상 아버지를 보지 않고 살았다"고 했다. 이후 서씨가 아버지와 가까워지게 된 건 2017년 아버지가 아프다는 걸 알았을 때였다. 서창덕씨는 암 판정을 받았다. 서씨는 "평생 소원이 두 개 있었는데 하나는 아버지와 목욕탕을 같이 가는 것, 사진 한 번 같이 찍는 거였다. 서울에서 병원을 다녀오며 억지로 사진 하나를 찍었고, 아버지가 아파 움직이지 못할 때 샤워 한번 같이 했다"고 말했다.

◇납북어부 피해자 故서창덕씨의 아들 서진석씨가 아버지의 유골함을 바라보고 있다. 군산=신세희기자

■아직 남아있는 낙인=아들 서진석씨가 본보 인터뷰에 응한 것은 아버지가 모든 범죄를 벗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서창덕씨는 2008년 재심을 통해 1984년 뒤집어쓴 죄에서 벗어났다. 서진석씨는 그때서야 아버지가 억울한 일을 당했다는 걸 알게 됐다고 했다. 그렇게 아버지의 간첩죄는 무죄가 됐지만 1969년 입은, 북한을 찬양하고 고무했다는 혐의는 남았다. 유족들은 2013년 이에 대해 재심을 신청했지만 법원은 당시 공판조서만으론 증거가 부족하다며 기각 결정을 내렸다. 2016년, 2020년 유족들은 새 증거가 나올 때마다 계속해서 재심을 청구했으나 재심 사유가 안 된다는 법원의 입장은 바뀌지 않았다. 서진석씨는 “1969년 같은 사건을 놓고 민사소송에서는 불법구금을 한 것을 인정한다며 일부 보상금을 줬지만 형사소송에서 무죄를 주지 않았다. 왜 다른 결과가 나는지 답답하다. 아버지가 많이 기다렸는데 이를 보고 가지 못해 슬프다”며 “최근 승룡호에 같이 탑승했던 선원의 가족을 찾았고 증언을 확보해 또다시, 끝까지 재심을 신청할 것”이라고 했다.

■함께 목소리를 낼 단체의 필요성=서진석씨는 최근 동해안에서 일어난 납북귀환어부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서해안에도 목소리를 함께 낼 단체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단다. 그는 “전북 군산이나 부안, 선유도, 충남 장항 등 서해안에도 피해자들이 많고 무죄를 못 받고 있는 사람들이 수두룩하다. 군산시의원들에게 동해안 조례안을 보여주고 조례 필요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피해 어부들이나 유족들은 잘 나서지 않으려 하지만 그럼에도 그가 앞장서는 이유는 그나마 젊은 나이와 아버지 생각 때문이다. 서씨는 "(납북귀환어부) 피해자들은 나서는 것 자체를 꺼려하고 누굴 만나는 걸 싫어한다. 그때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저희 아버지 역시 또 잡혀갈까 봐 살아 계실 적에도 해가 떨어지면 바깥에 못 나갔다. 그런 모습이 답답하기도 했었다. 시민단체가 만들어지면 바닷가 동네에 플래카드를 걸고 피해자들을 찾을 계획"이라고 했다. 그는 “아버지가 생전 주위 피해자들을 많이 챙겼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 연결해드리고 재판도 받게 하셨다. 아버지가 바라던 일이고, 억울한 피해를 구제하는 건 꼭 해야 하는 일이니 그 일을 이어 하고 싶다”고 힘주었다. 그는 동해안에서 나오고 있는 무죄 판결이 힘이 되고 있다고도 했다. 서씨는 "판례를 법원에 증거로 제출할 수가 있어서 무죄가 많이 나오면 나올수록 좋다. 지금까지 무죄를 못 받은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 더 희망이 생기는 거다. 함께 노력해서 국가의 잘못을 바로 잡아야 하지 않겠나. 혼자서 이걸 바로잡을 수는 없고 목소리를 함께 내줄 분들이 필요하다. 서해안과 동해안 피해자들이 서로 힘이 됐으면 좋겠다. 내년 여름 안에는 모임을 결성하고 싶다"고 밝혔다.

■끝나지 않는 피해자의 고통="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마지막으로 아버지 명예회복만 시켜달라고, 자기가 무죄를 못 받고 죽는 것이 한이 된다고 그 말씀을 했어요."

서씨는 잘 살고 있던 피해자들을 조작해 간첩으로 만든 것에 이어서 피해자들을 조작했던 이들의 훈장도 박탈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아버지가 고문수사관 훈장을 박탈시키고 싶어했다. 죄 없는 사람을 범죄자로 만들어 놓고 그들은 국가에서 연금을 타고 호의 호식하면서 살았을 것 아니냐"며 "아버지는 배를 탈 수 없었고, 맞아서 잘 구부러지지도 않는 손으로 고물을 주우며 사셨다. 누군가 아버지 고문수사관을 찾아갔는데 왜 이제 와서 그러느냐고 욕만 했다더라. 언젠가 '내가 서창덕 씨 아들이다. 나한테 할 말 없냐' 이렇게 물어보고 싶다"고 말을 흐렸다. 서씨는 국가에 바라는 건 하나라고 강조했다. 그는 "똑같은 법인데 성향이 다르다고 해서 판결이 달라지면 안 되지 않나. 법은 하나인데 왜 달라지는지 모르겠다. 판례에 따라서 판결을 해 주셨으면 좋겠다. 그게 전부"라고 했다. 서진석씨를 만난 납골당에는 서씨가 아버지에게 보여드리고 싶어 놓아둔 그의 아들 사진이 있었다. 그는 아들이 사진에 나오지 않게 해달라고 신신당부했다. 서씨는 혹여나 피해가 갈까봐 군산이 아닌 다른 지역에서 아들을 키우고 있단다. 서글서글하게 웃는 그에게는 아직도 수 십년 전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전북 군산=이현정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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