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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일반

[특집]"죽을 때까지 싸울 거예요…같이 싸워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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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과거사-납북귀환어부 간첩조작사건](4)누명 벗은 군산 어부 정삼근씨…무죄 기다리는 유족 고모씨
군산 어부 정삼근씨 1968년 납북…반공법, 간첩 혐의 무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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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을 때까지 국가의 사과를 받기 위해 싸우겠다'고 말한 납북귀환어부 정삼근(80)씨.

지난달 서해안의 납북귀환어부 취재를 위해 전북 군산을 방문했을 때, 취재진은 군산항에서 배를 타고 40~50분 거리에 있는 개야도를 찾을 예정이었다. 개야도는 납북귀환어부 간첩조작사건이 빈번히 일어났던 섬으로, 이곳에서 지내는 정삼근(80)씨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야속하게도 기상 상황이 좋지 않아 여객선 운항이 통제됐고, 그와는 바다를 사이에 두고 전화로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날 군산지역과 육로가 뚫려 있는 또 다른 섬의 고모(61)씨와도 만났는데, 납북귀환어부 유족인 그는 또다시 피해를 입을까 두렵다며 이름과 얼굴이 노출되지 않기를 부탁했다. 누명을 벗은 서해안의 어부와 무죄를 기다리는 유족, 두 사람의 상황은 달랐지만 끝까지 국가에 맞서 싸우겠다는 다짐은 같았다.

냉가슴 앓았던 지난 세월=개야도 출신인 정삼근씨가 납북됐던 건 1968년이었다. 스물 다섯, 영창호를 타고 연평도 인근 해역에서 조기 잡이를 하던 그는 북한에 끌려갔다. 5개월 만에 귀환했지만 반공법 위반 등의 혐의로 징역 1년을 살았다. 어업이 유일한 생계 수단이었던 그는 이후에도 고기잡이를 하며 1남 5녀의 자녀를 키웠다. 그러던 1985년, 간첩활동 혐의로 재차 붙잡혀갔다. 정씨는 "막내가 8살이었다. 처제 결혼식에 가려고 군산에 있는 처갓집을 찾았다. 도로와 바로 붙어있던 집이었는데 누가 잠깐 이야기 좀 하자고 들어오더라. 나갔더니 영문도 모른 채 바로 차에 실려 끌려갔다. 보안대원들이었던 것"이라고 회상했다. 당시 보안대 고문에 못 이겨 수사관이 건넨 진술서를 그대로 베낀 것이 간첩 혐의가 됐고 징역 7년 옥고를 치뤘다. 집안은 쑥대밭이 됐다. 주변 사람들의 멸시에 시달렸고 아이들은 '간첩 자식'이라는 놀림을 받았다. 그는 보안대에 끌려가기 1년 전 뉴스를 통해 개야도 동네 주민이던 납북귀환어부 고(故)서창덕 씨 이야기를 접했다고 했다. 정씨는 "뉴스를 보고 할 짓이 없어 간첩질을 하냐며 저런 나쁜 놈이 어디 있느냐고 욕을 했다. 근데 내가 딱 1년 후에 잡혀가고 보니 그게 오해였다는 걸 알았다"고 고백했다.

무죄를 받았음에도 깊이 남은 상처=정씨는 2010년 재심을 통해 간첩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받았다. 2017년에는 반공법위반 혐의 무죄를 받으며 억울함을 풀었다. 하지만 그는 가족들이 받은 상처를 생각하면 가슴이 저민다고 했다. 정씨의 부인은 행방불명이 된 남편을 찾아 2개월이 넘는 시간을 헤매고 나서야 그의 소식을 접했다. 부인이 남편을 애타게 찾던 중, 빈 집에 홀로 남아 있던 열 일곱의 큰 딸은 수사관들을 맞닥뜨린 일로 큰 충격을 받았다. 정씨는 "수사관들이 너희 아빠가 간첩이라며 온 집안을 들쑤시고 다니니까 큰 애가 실성을 했다. 그 때 쓰러지고 나서 정신 이상이 생겼다. 7년 후 내가 출소해서 병원에 데려갔을 때 장애 판정을 받았고 지금도 데리고 같이 산다"고 말끝을 흐렸다. 군산경찰서 타자부로 일하던 둘째 딸은 곧바로 해고됐다. 출소 뒤 자신이 간첩이 아니라고 해도 동네 사람들은 믿지 않았고 말조차 걸지 않았단다. 수십년이 지나 억울함은 풀었으나 고문 후유증으로 어깨를 제대로 쓸 수 없다. 그는 무시를 하려고 해도 환상처럼 악몽을 꾸는 일이 여전하다고 털어놨다.

“나는, 죽을 때까지 싸울 거예요”=정씨는 누명을 벗어 여한이 없다면서도 '국가의 사과', '수사관 처벌', '남아있는 이들의 억울함을 알리는 일'을 위해 끝까지 싸우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 일에 함께 나서 달라고 재차 부탁했다. 그는 같은 납북귀환어부들도 많이 도왔다. 정씨는 "지금은 대부분 죽고 없다. 내가 무죄를 받고 나니까 기분이 정말이지 좋더라. 두 발을 뻗고 잘 수 있게 되니까 주위 사람들을 다 도와주고 싶었다. 이 기분을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며 "억울한 거 말하라고 해도 귓등으로도 안 듣던 사람들이 내가 무죄를 받으니까 어떻게 하면 되느냐고 물어오더라"고 했다. 그는 발 벗고 나서 변호사에게도 절차를 물어봐 주고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도 연결해줬다고 했다. 지금도 동네에서 억울하게 간첩으로 조작된 이를 돕고 있는 중이다. 정씨는 "억울하게 납북된 사람들, 지금까지 그 누명을 못 벗고 있는 사람들, 숨어 지내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걸 모든 국민이 알아야 할 거 아니냐"면서 "나는 무죄를 받기는 했어도, 지금도 국가 사과를 받고 싶다. 나를 그렇게 만들었던, 잘못한 수사관들 제대로 처벌받게 하고 싶다. 죽을 때까지 싸우려고"라는 말을 남겼다.

◇납북어부 유족인 고모씨가 본보 취재진을 만나 아버지의 생애를 이야기하고 있다. 군산=신세희기자

납북됐다가 귀환한지 얼마 안 돼 돌아가신 아버지=1968년 납북됐던 어부 A씨는 남한에 귀환한 후 반공법 위반 혐의로 고문을 받았고, 1년이 채 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A씨의 유족인 고씨는 "어찌나 고문을 당했는지 집에 온 지 1년도 되지 않아서 돌아가셨다는 게 마음이 너무 아프다“고 말했다. 고씨가 9살쯤 됐을 때였다. 고씨는 “아버지가 집에 와서 많이 아프셨다. 아버지가 막내딸이라고 나를 엄청 예뻐했는데, 무릎에다 앉혀 놓고, '내가 거기를 안 갔으면 우리 딸 시집 갈 때도 보고 그럴 텐데 내가 거기 갔다 오는 통에 죽게 된다'고 그랬다. 그게 지금 너무 마음이 미어진다”고 했다. 또 그는 “4남 2녀 집안에 딸이 귀하다고 저를 꼭 안고 주무실 때가 있었다. 근데 아버지가 밤에 주무시면서 엄청 깜짝 깜짝 놀래며 깨시더라. 지금 생각해보면 공포에 떠는 모습이었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아버지가 갑작스레 돌아가신 후 가족들의 삶은 녹록치 않았다. 어머니는 어린 여섯 자식들을 데리고 생계를 유지해야만 했다. 고씨의 오빠들이 학교를 졸업하고 취직을 하려고 해도 할 수가 없었다. 고씨는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어머니에게 거기 갔다 와서 당신(어머니)과 자식들을 책임 못져 미안하고, 많이 걱정된다고 말씀하셨다더라. 고문을 엄청 당해서 이 길로 갈 수밖에 없는 것 같다고 자책했다더라. 모두 밝힐 수는 없지만, 자식들이 아버지 때문에 앞길이 막힌 것 같아 많이도 원망하고 힘든 세월을 보냈다”고 회고했다.

◇납북어부 유족인 고모씨가 본보 취재진을 만나 아버지의 생애를 이야기하고 있다. 군산=신세희기자

야속한 세월, 지나가 버린 수십년=고씨는 사실 아버지에 대한 정보를 많이 갖고 있지 않다. 그는 아버지가 감옥을 다녀오고 고문을 당했다는 것만 어렴풋이 알았지 납북됐다가 간첩으로 조작됐다는 이야기는 최근에서야 제대로 알게 됐다고. 고씨는 “내가 어렸기도 했고, 아버지는 말을 잘 안하시는 편이었다”며 “오빠들에게 (관련 피해) 이야기를 좀 한 것 같은데 지금은 오빠 네 분이 모두 돌아가셨다. 한 분만 살아계셨어도 정보가 더 많을 텐데”라고 했다. 그가 최근 재심에 나서게 된 건 아버지와 함께 반공법 위반 혐의로 불법 체포됐던 고(故) 양재천씨의 아들 양은석씨의 연락 덕분이었다. 1969년 고씨의 아버지와 양재천씨를 비롯한 9명은 함께 술을 마시던 중 동료 선원이 북한을 찬양하는 것을 듣고도 수사기관에 알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억울한 옥살이를 했다. 양은석씨가 아버지의 일에 대해 재심을 신청, 무죄를 받은 후 같은 피해자들을 찾으면서 고씨에게도 연락이 가게 됐다. 고씨는 “나 뿐만 아니라 절차를 몰라서 재심을 신청하는 이들이 꽤 된다. 나조차도 아버지가 어떤 배를 탔는지 이름조차 몰랐다. 아무래도 목소리를 같이 내는 분들이 있으면 정보를 조금 더 쉽게 알 수 있지 않나 싶다”고 말했다.

■바라는 건 오직 무죄=고씨는 “사실 보상이 나온다 해도 반갑지 않다"고 했다. 그는 "아버지가 그렇게 고통을 받았고 얼마 살지 못하고 바로 돌아가셨는데, 돈이 다가 아니지 않나. 얼마나 고통스러웠겠나. 내가 직접 들은 것이 없어도 같은 피해를 입은 이들에게 들으니 고춧가루, 전기 고문을 받았다고 하는데 그런 생각을 하니까 너무 마음이 아프고 상상을 하니까 잠을 못 자겠다. 눈을 감으면 자꾸 떠오르고, 건강했던 우리 아버지가 왜 이렇게 일찍 돌아가셨나 싶다"고 울먹였다. 그는 "누가, 무엇을 위해 우리 아버지를 그렇게 했나 생각한다. 내가 죽을 때까지 마음이 아플 것 같다. 자식으로서 오로지 재심을 해서 무죄 판결 받는 것, 돌아가신 아버지 명예를 회복하는 것, 그게 바라는 바다"라고 힘주어 말했다. 전북 군산=이현정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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