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일반

[정일주의 지면갤러리]4·3의 비극을 그리는 운명 … 그의 풍경은 ‘제주의 정신’

(11)강요배-붓을 들어 제주의 아픔 밝히고 세상을 위로

4·3사건 당시 제주 태생 독특한 이름지어

고향역사 탐구 나 자신을 확인하는 과정

'제주 민중 항쟁사' 연작 50여점중 하나

1991년 '동백꽃 지다' 비극적 역사 남아

최근 사사로운 것들에 시선 돌려 작화중

새로운 시선·화풍으로 완성 '설담' 주목

대구·경산 사건 모티브 민중의식 드러내

타지역 참상 '민중 불상사' 4·3과 맞닿아

◇강요배 作 ‘대지 아래 산’(2021)

그는 제주의 정신이다!

어떤 작품세계는 그 진경에 들기 위해 작가의 이력부터 찾아보게 만든다.

작가 강요배(1952~ )의 작품세계가 그러하다.

그의 태생과 작품활동은 톱니바퀴처럼 단단히 맞물려 있다.

제주도에서 태어난 강요배는 서울대 미술대학 회화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1980년 ‘현실과 발언’ 동인으로 사회 모순을 다룬 작품을 발표하며 민중미술의 중심에 섰다.

눈길을 제주로 돌린 그는 “제주 4·3은 내 화폭에 담아야 할 운명”이라며 고향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감춰진 역사의 진실을 주제로 한 연작을 제작, 4·3사건에 대한 국민적 관심을 환기시킨 바 있다.

다양한 장르가 혼재한 현대미술의 흐름 속에서 ‘회화’를 중심으로 작품세계를 심화시키는 한편, 그동안 1998년 민족예술상을 비롯해 2015년 이중섭미술상, 2020년 이인성미술상 등을 수상하며 세상 속으로 파고들었다.

◇강요배 作 ‘설담''(2020)

■주변도 함께 아픈 세계

눈 쌓인 평상마루에 세 개의 유자열매가 놓여 있다. 올망졸망 서로 대화를 나누는 듯 맑고 담백한 표정이 일품이다.

‘설담(雪談)’(2020)은 평화로운 느낌과 상큼한 화면으로 보는 이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끊임없이 제주의 신산한 역사와 자연의 아름다움을 캔버스에 담아 온 강요배는 최근 들어 주변의 사사로운 것들에 시선을 주고 있는 것 같다. 바람, 구름, 산, 바다, 눈 등이 그의 붓질 속에 특별한 풍경으로 거듭난다. 그는 서양 미술사에 없는 새로운 것을 만들고 싶고 새로운 시선을 가지고 싶다고 강조한다. 그래서인지 그가 내놓는 신작들은 새롭디새롭다. 시시각각 변하는 바람과 빛, 비, 파도처럼 그의 그림은 반복을 거듭할 새가 없다. 일일신 우일신(日日新 又日新)할 따름이다.

“회화매체의 확장과 깊이를 더하며 밀도 있는 작품세계를 보이고, 오랜 시간 지속적인 작업을 통해 시대와 역사에 충실하고 다양한 화풍의 변모를 추구한다.”

제21회 이인성미술상 수상자로 강요배를 선정하며 평론가들은 이렇게 그의 작품세계를 평가했다. 그렇게 개최된 ‘강요배:카네이션-마음이 몸이 될 때’(2021)전에는 대자연의 풍경을 담은 대형 회화를 비롯해 사운드와 움직임에 집중, 직접 촬영한 영상작업, 대구·경산의 역사적 사건을 모티브로 한 상주비단 설치작업 등을 선보였다. 이 수상 작품전에 ‘설담’이 놓여 있었다.

대형 캔버스에 제주의 자연과 역사적 사건들을 주제로 작업해 온 그는 자연의 소리를 생생하게 시각화한다.(청각의 시각화!) 그 시각화한 소리는 다시 관람자의 마음에서 자연의 바람소리, 파도소리로 재생된다.(시각의 청각화!) 그는 나아가 시각과 청각 등의 감각을 활용해 자연의 생생한 숨결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영상매체를 활용하기도 했다.

이 자연의 소리는 그러나 제주의 처참한 역사를 배경에 깔고 있어 보는 이의 가슴을 무겁게 짓누른다. 강요배에게 제주의 역사는 뼛속 깊이 체화(體化)된 것이어서 그의 풍경은 4·3사건을 표현하지 않아도 그 여운이 함께한다. 그의 풍경은 해맑지 않다. 눈 속의 유자열매도 아프다.

◇강요배 作 ‘바비가 온 정원''(2021)

■특이한 이름 속의 4·3사건

그는 ‘설담’처럼 순간의 장면을 포착해 ‘자연 풍경’을 제고하게 만드는 한편 ‘대구’라는 지역의 역사성에 대해서도 고찰한다. 경산의 ‘코발트광산 학살사건’과 ‘10월 항쟁’을 모티브로 한 새로운 작업을 통해 자신의 회화 작업세계에서 중요하게 자리한 민중의식을 드러낸 것이다. 그에게는 타 지역의 참상은 곧 또 다른 제주 4·3의 참상이기도 했다. 모두가 민중의 불상사라는 점에서 그 사건들은 둘이 아니라 하나다.

강요배의 작품에서 제주 4·3사건 연작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국가가 무력으로 민간을 희생시킨, 1948년 4월3일부터 1954년 9월21일까지 제주도에서 일어난 민중항쟁을 주제로 1980년대 말부터 작품들을 완성해 당시 처참했던 상황을 극적으로 보여주었다. 그는 태생부터 4·3사건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강요배는 4·3사건이 여전히 미종결 상태였던 1952년에 태어났다. 당시는 대부분의 제주도민에게 이승과 저승은 한 치 차이였다. 제주는 무법천지였다. 동명이인(同名二人)인 경우, 서로 구분도 하지 않고 모두 학살해버리는 사례가 비일비재했다. 그래서 강요배의 아버지는 절대 같은 이름이 나올 수 없는 독특한 이름을 아들에게 지어주었다. 그렇게 ‘요배’라는 이름을 얻고, 운명처럼 ‘4·3 화가’로 작업에 매진하고 있다. 그는 어디선가 고향의 역사를 탐구하는 일은 내가 누구인지를 확인하는 과정이었다고 말한 바 있다.

◇강요배 作 ‘동백꽃 지다''(1991) 사진= 대구미술관 제공

■동백꽃 지던 그날의 참상

1991년 선보인 ‘동백꽃 지다’는 그가 집중적 연구와 작업 끝에 성축해 낸 ‘제주 민중 항쟁사’ 연작 50여 점 중 한 점이다. 화면에는 핏빛 동백꽃이 지고 있다. 목숨이 지듯이 툭 떨어진다. 실제로 동백꽃이 떨어질 땐 이처럼 빨간색이 그대로 남아 있지 않다. 갈변하고 마른 다음 낙화한다. 그런데 그림에서 동백은 통째로 떨어진다. 아니 꺾였다. 그리고 원경으로 언 계곡 위를 걸어가는 검정 물체가 보인다. 화면의 귀퉁이로 사라져가는 이들의 뒷모습은 너무나 비극적이다. 햇빛을 벗어나 축축한 숲속에서 떨어지는 붉은 동백. 슬픔이 섬뜩한 이 풍경화는 이곳에서 실재했던 사건을 고스란히 상징한다.

서울에 살면서 4·3 유족들의 증언을 듣고 작품으로 풀어내던 때, 몸과 마음의 건강에 무리가 생긴다. 약해진 체력을 이끌고 제주로 귀향한 이유이기도 했다. 그는 4·3 연작을 모아 출간한 ‘동백꽃 지다’(1998)라는 화집에 이렇게 적었다.

“삶이란 무엇인가? 죽음의 그림자를 끊임없이 걷어내는 일이라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그것은 언제나 천하에 가득할 것이다. 절망을 딛고 올라서는 곳에 새봄의 꽃처럼 생이 있는 게 아닐까?”

◇강요배 作 ‘먼나무''(2022)

■그의 작품은 제주의 깊은 속내

‘할 수 있는 일이 그리는 것뿐’이라 말하는 강요배에게 화가가 되는 일이란 평생에 걸쳐 쉼 없이 작업하는 일 자체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는 더 깊어진 시선으로 제주의 정신을 넘어 무심한 우리 마음에 제동을 걸어 감응하고 신생하게 한다.

강요배의 작품은 바야흐로 제주의 천 길 속내다.

월간 퍼블릭아트 편집장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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