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일반

[타임머신 여행 라떼는 말이야]1983년 중국민항기 춘천 불시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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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가 1992년 8월 24일 중국과 국교를 정상화하여 수교한지가 올해로 31년째이다.

중국과의 수교에는 춘천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1983년 5월 5일 어린이날인 대낮에 수도 서울에 갑자기 요란한 사이렌이 울리고 “실제상황입니다. 주민들은 비행기 폭격으로부터 안전한 곳으로 대피하세요”라는 방송이 이어졌다.

이른바 ‘중국 민항기 불시착 사건’이었다. 승객 96명(납치범 6명 제외), 승무원 9명을 태운 중국민항(中国民用航空总局) 소속 여객기는 선양 동탑공항(瀋陽,東塔空港)을 떠나 상하이 훙치아오국제공항(上海,虹桥国际机场)으로 가던 중이었다.

탁장인(卓章仁) 등 6명의 납치범들은 기내를 무력으로 장악하고 기수를 대한민국으로 돌릴 것을 요구했으며 승무원들에게 총격을 가해 기수를 강제로 돌렸다. 중화인민공화국 본토를 출발한 비행기가 대한민국에 착륙하기는 건국 후 처음이었다.

비행기는 서울을 피해 춘천의 주한미군 부대인 캠프 페이지(CAMP PAGE) 기지에 불시착했다. 시민들은 캠프페이지 안에 불시착한 비행기를 철책 너머로 해방이후 처음 나타난 중국인들을 신기한 눈으로 바라봤다. 납치범들은 중화민국(대만) 대사 면담과 중화민국으로의 정치적 망명 허용을 요청했다. 당시 안기부 박세직(3사단장 역임) 해외 담당 제2차장이 대책반장을 맡아 납치범들을 기내에서 직접 면담해 요구 조건을 수용할 의사를 밝혀 납치범들의 무장을 해제 시켰다.

실무 담당자 중 한명은 당시 법무부 출입국 박희태 관리국장(후에 국회의장)이었다 당시 중국과는 미수교 상태였기 때문에 이 사건은 외교적, 정치적으로 엄청난 파장을 몰고 왔다. 우리 정부는 이 사건을 최대한 정치적으로 이용하려 했다. 이 사건의 해결을 위해 중국 정부는 북한을 의식하여 간접교섭방법을 통해 항공기와 승무원의 송환을 협상하려 소극적이고 제한적인 접촉을 원했다. 하지만 협상의 주도권을 거머쥔 우리 정부의 고자세에 직접적인 교섭으로 전환하지 않을 수 없었고, 사건 발생 3일 만에 중국민항총국장 심도(沈圖) 및 33명의 관리와 승무원이 직접 서울을 방문해 당시 공로명 외무부차관보(후에 외교통산부 장관 역임)를 대표로 하는 우리 측과 협상을 벌였다. 교섭의 핵심은 납치범의 처리와 서명당사국의 명칭이었다. 당연히 중국 측은 납치범들은 범죄인들로 간주하고 인도를 요구 했고, 양국의 국가 명칭도 사용치 않으려 했으나, 결국 9개 항에 걸친 정식 외교 각서에 서명을 하고, 명칭도 ‘대한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이라는 정식국호를 사용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항공기는 안전점검 후, 승무원, 탐승객은 부상자 치료 후에 중국으로 돌려보내기로 했으나 납치범은 우리 뜻대로 대한민국 헌법에 의해 재판할 것과 향후 유사한 사건이 발생될 때 긴밀히 협조한다는 선에서 합의가 이루어졌고, 다음해부터 친인척의 방문 교류를 허용하기로 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승객과 승무원들을 당시 최고급인 워커힐 호텔에 투숙시킨 뒤, 여의도와 자연농원(에버랜드) 관광을 시켜주었고, 출국 시에 삼성 컬러 TV를 선물하는 등 한-중 관계개선의 지렛대 역할로 이 사건을 활용하려고 노력했다. 또한 납치범 6명은 1년간의 형식적인 구속 수감 후, 추방형식으로 중화민국으로의 정치적 망명을 허용했다.

이미 중국정부는 한-중 수교를 예견하고 친인척 방문을 기회로 중국의 안전부(우리의 국가정보원) 소속은 물론 조선족 공무원들을 부부동반으로 동원하여 한국의 각지에 보내 양국 수교에 시작을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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