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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떼는 말이야]중학교 추첨…“우리는 왜 뺑뺑이를 돌렸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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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입학시험 제도가 폐지되고 입학추첨제가 전국적으로 확대된 1971년, 강원도내 한 중학교 진학 추첨장에서 국민학교(초등학교) 졸업을 앞둔 아이들이 자신이 진학할 학교를 뽑고 있다. 사진=강원일보 DB

원하는 중학교에 가기 위해서는 시험을 봐야 했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으로 부터 55년 전인 1968년까지 그랬다. 당시에는 이른바 명문으로 분류되는 중학교에 들어가기 위해서 현재의 수능시험과 같은 입학시험을 좋은 성적으로 통과해야만 했다. 자유학기제가 도입되고 중학교 2학년이 돼야만 정식 시험을 치르는 요즘과 비교하면 딴 나라 얘기 같지만 그땐 그랬다. 당시에도 ‘입시지옥’이니 ‘지옥문’이니 하는 그런 말들이 심심치 않게 쓰였는데, 오히려 대입 학력고사가 아닌 중학교 시험의 살벌함을 비유할 때 많이 등장하곤 했다. 이제 세상을 10년하고 조금 더 산 아이들에게는 가혹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당시 신문을 살펴보면 그 상황이 얼마나 심각했는지 알 수 있다.

“입시지옥으로 요약되는 중학입학 시즌이 눈 앞에 다가왔다. 수험생들은 비좁은 입시지옥문이 도사리고 있는 도시의 유명교로만 불개미떼처럼 달려붙는다. 극한 경쟁이 시작되는 것이다. 이순간 어린이들에게선 동심이 사라진다. 사진선다형과 OX문제가 가득차 있는 시험지를 앞에 놓고 꼬마들의 머리는 자동퀴즈기로 변해버린다. 부모들의 채찍질하는 눈초리를 의식하며 시험장에 앉은 어린이들의 마음은 불안과 긴장과 초조가 뒤범벅. 낙방의 고배를 마신 어린이들은 극도의 열등감과 …”

(경향신문 1966년 11월30일자 기획기사 ‘입시지옥 20년 ① 中)

이처럼 입시경쟁이 과열되면서 ‘열세살’짜리 재수생이 생겨나는 웃지 못할 상황까지 벌어진다. 1960년대 문교부(현재의 교육부) 자료에 따르면 한 해 2만명 정도의 ‘중입’ 재수생이 생겨났다고 하는데, 인생 초반에 세상 쓴맛 한번 제대로 본 당시 국민학생(초등학생)들의 처지가 그저 측은할 따름이다. 아이들을 좋은 학교에 보내기 위한 ‘치맛바람’은 이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일류 중학교에 시험을 쳤다 떨어진 한 학생은 빚까지 내가며 가정교사를 두고 과외를 받던 중 부모의 과도한 기대에 부담감을 느껴 시험 일주일을 앞두고 정신이상 진단을 받았고, 이에 충격을 받은 부모도 증세를 보여 나란히 정신병원에 입원하는 어이없는 사건까지 발생했다. 또 시험에 떨어진 아이들이 가출소동을 벌이거나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일까지 생겨 나면서 심각한 사회문제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특히 때이른 입시에 내몰린 우리 아이들의 체형까지 일본의 또래들과 비교해 왜소해지고 있다는 내용까지 중학교 시험으로 인한 폐해의 사례들이 차곡차곡 쌓이면서 문제 해결의 필요성에 대한 공감대는 널리 퍼져 나갔다. 하지만 이러한 지적에도 중학교 입학시험제도는 좀처럼 바뀔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중학교 입학시험 제도가 폐지되고 입학추첨제가 전국적으로 확대된 1973년, 강원도내 한 중학교 진학 추첨장에서 국민학교(초등학교) 졸업을 앞둔 아이들이 자신이 진학할 학교를 뽑고 있다. 사진=강원일보 DB

해결의 실마리는 의외의 사건에서 시작된다. 바로 그 유명한 ‘무즙파동’과 ‘창칼파동’이 그것이다. 먼저 ‘무즙파동’은 1964년 서울의 한 중학교 입학시험에서 ‘엿을 만들때 엿기름 대신 넣을 수 있는 것’을 묻는 문제가 나오면서 촉발됐다. 정답의 예로 (1)디아스타제 (2)꿀 (3)녹말 (4)무즙이 제시됐다. 정답은 (1)번 ‘디아스타제’. 하지만 학부모들은 무즙에도 디아스타제가 들어있다면서 강력하게 반발하고, 이때부터 교육당국의 갈팡질팡 행보에 학부모들의 의견이 갈리면서 공방이 이어진다. 문제 자체를 무효화 했다가 반발이 심해지자 다시 디아스타제만 인정한다고 밝히지만 이듬해 희대의 ‘무즙재판’으로 이어지면서 법정 공방 끝에 무즙도 정답으로 인정받기에 이른다. 그런데 또다른 문제가 발생한다. 이미 입학정원을 다 채운 해당 중학교가 추가 입학이 불가할 수도 있다는 입장을 내놓은 것. 하지만 이러한 규정도 학부모들의 극렬한 항의를 이길 수 없었고, 결국 전원합격으로 마무리 된다. 1967년 ‘창칼파동’도 시험문제가 문제였다. 질문은 ‘목판화를 새길 때 창칼을 바르게 쓴 그림은?’이었고, 이 역시도 복수정답 시비에 휘말리게 된다. 무즙파동 때 이미 한차례 학습이 된 학부모들은 역시 소송을 제기한다. 그 수가 무려 549명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번에는 패소하고 만다.

이처럼 불필요한 갈등들이 계속해서 생겨나자 1968년 7월 문교부는 1969년부터 1971년까지 3개년 계획으로 중학교 입학시험제를 폐지하는 대신 입학추첨제를 실시하는 내용을 담은 ‘중학교 무시험 진학제도’를 발표한다. 이 제도는 1969년 서울에서 처음 실시되고, 1971년부터 전국으로 확대된다. 사진 ①은 바로 중합교 입학시험이 사라지고 추첨제가 처음 실시된 1971년 강원도내의 중학교 진학 추첨장 모습이다. 시험 스트레스에서 해방된 아이들의 모습이 편안해 보이기도 하지만 은행알에 운명(?)을 걸어야 하는 또다른 입장에 서 있어서인지 긴장한 모습도 역력하다. 사진 ②는 입학추첨제를 실시한지 3년차 되는 해라는 점에서 추첨장의 꾸밈새가 비교적 짜임새를 갖춘 모습이다. 그래도 나무로 된 추첨기를 돌리기 위해 줄을 서 있는 아이들의 표정에는 여전히 긴장감이 흐른다. 추첨기 사용 방법은 이랬다. 오른쪽으로 두번 돌리고, 왼쪽으로 한번 돌려서 떨어지는 은행알로 학교를 배정받는 것이다. 이 수동식 추첨기를 ‘뺑뺑이’라고 불렀고, 추첨하는 모습을 “뺑뺑이 돌린다”고 표현했다고 한다. 그래서 ‘평준화’라는 온전한 단어를 두고 ‘뺑뺑이’라는 표현을 우리는 얼마 전까지도 사용했었다. ‘뺑뺑이 세대’의 탄생은 그렇게 이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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