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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의궤 톺아보기]'노블레스 오블리주' 실천한 조선시대 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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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열전 (2) 김만덕(上)
조선시대 최초 여성 CEO 김만덕
고아에서 기녀 그리고 거상으로

◇김만덕 표준영정. 출처=제주도 김만덕 기념관

조선왕조실록이 계급제도가 엄격했던 조선시대에 천민 바로 위의 계급인 상민 그 중에서도 여성의 이야기를 기록한 것은 극히 드문 일이다. 그 가운데 조선시대 후기 여성 거상 김만덕(金萬德·1739~1812)의 삶은 많은 이에게 감동을 주기에 충분해 보인다. 그는 평생 모은 재산을 과감히 포기하는 것으로 자신이 살고 있는 제주도 백성들의 목숨을 살려내는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를 몸소 실천한 인물로 시대를 넘어 존경받고 있다.

김만덕에 대한 언급은 1796년 조선왕조실록(숙종실록)에 단 한번 기록돼 있다.

“제주(濟州)의 기생 만덕(萬德)이 재물을 풀어서 굶주리는 백성들의 목숨을 구하였다고 목사가 보고하였다. (정조실록 45권, 정조 20년 11월 25일)”

실록의 이야기를 뒷받침하는 자세한 내용은 조선시대 문신 번암 채제공(1720~1799)이 김만덕의 선행에 감복해 써내려 간 ‘만덕전(萬德傳·번암집 제55권)’을 통해 확인해 볼 수 있다. 만덕전의 내용으로 확인할 수 있는 김만덕의 모습은 자신의 삶을 스스로 개척한 여장부로서의 비범한 이미지가 강하게 드러난다.

◇ 김만덕의 선행을 기록한 ‘정조실록 45권 정조 20년 11월 25일’ 내용. 출처=국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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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덕전(萬德傳·번암집 제55권) 이미지. 출처=한국고전번역원.

제주도 양인의 집에서 태어난 만덕은 어려서 부모를 잃고 기녀에 의탁해 살아간다. 그의 이름은 기안(妓案·관기들의 기녀 명부)에 올려져 있었으나 자신을 기생이라고 생각지는 않았다. 만덕은 나이 20세가 되던 해에 관아를 찾아 자신의 상황을 울며 호소해 기안에서 이름을 삭제하고 양인신분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만덕은 집에서 용노(傭奴·삵을 주고 부리는 종)로 생활했지만 재화를 늘리는데 재주가 뛰어나 물건의 가치를 시기에 맞게 판단하는 재능을 갖고 있었다. 그는 값이 비쌀 때는 내다 팔고 값이 쌀 때는 사서 저장해 두는 방식으로 부를 쌓으면서 부자로써 이름이 알리게 된다. (만덕전 중)

만덕이 거상으로 부를 늘리며 승승장구 하던 시기, 그의 고향 제주는 계속되는 기근에 굶어 죽는 사람들이 늘어난다. 그러자 조정이 나서 제주도 백성들을 구휼하기 위해 배로 곡식을 실어 나른는 일이 빈번해 진다. 1794년 전 제주목사 심낙수 제주에 바람이 강하게 불어 기와가 날아가고, 돌이 굴러가 곡식이 짓밟히고 피해를 입은 것은 물론 바다의 짠물에 곡식에 김치를 담근 것 같이 절여졌다고 장계를 올렸다 이에 정조는 큰 기근이 든 제주에 곡식을 실어다 구휼하게 하고 1년 동안 공물 바치는 것을 면제해 주도록 명하였다.(정조실록 41권, 정조 18년 9월 17일) 1795년에도 정의현감 남속이 상소문을 올려 섬(제주) 백성이 잇달아 쓰려져 죽는 사실을 전달하고 곡식을 배로 운송해 진휼해 주기를 청했다.(정조실록 42권, 정조 19년 2월 14일) 하지만 제주 목사 이우현은 곡식을 싣고 가던 배 5척이 파손되면서 수백 포(包)에 달하는 곡식을 못쓰게 되는 일까지 벌어졌다고 정조에게 급하게 보고한다.(정조실록 42권, 정조 19년 윤2월 3일) 이를 지켜보던 만덕은 드디어 고향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육지의 쌀을 사들이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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