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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일반

[문화가 있는 주말] 전쟁통에도 음악 통한 치유에 혼신

/ 강원도 클래식 음악가 열전 / ⑤ 작곡가 하대응 (完)
한국전쟁 발발하자 대구로 피난
군가 보급단 결성·전선 위문 활동
교육·예총 발족 등 인재육성 앞장
홍천 출신 불구 대구 음악사 큰 획

◇작곡가 하대응

사단법인 민족음악학회에서 발행하는 ‘음악과 민족’ 34호에 게재된 ‘대구지역 음악연구의 현황과 과제’에 수록된 글 가운데 하대응 선생에 대한 언급이 있어 부분 인용한다.

“대구지역 대표적인 서양음악가 박태원, 박태준, 현제명, 권태호, 하대응,김진균, 이들 모두가 기독교의 영향에서 서양음악을 습득했던 것이다.”

특이한 사항은 열거한 인물 가운데 하대응 선생을 제외하곤 모두 대구지역 출신 음악가들이다. ‘동무생각’을 작곡한 박태준 선생이나 그의 형 박태원, 그리고 ‘희망의 나라로’를 작곡한 현제명, 국내에서 최초의 독창회를 연 성악가 권태호, 대구 음악의 토대를 다진 작곡가 김진균, 이들 모두 음악적 토양이 대구다. 유독 강원도 홍천 출신 하대응 선생이 이들과 함께 호흡하며 대구의 양악 발전에 깊이 관여해 큰 영향력을 끼쳤다는 사실은 매우 유의미한 일이다.

하대응 선생의 대구와의 인연은 6·25전쟁으로부터 시작됐다. 전쟁이 발발하고 대구로 피난 온 하대응 선생은 육군 군가 보급단을 결성해 전선을 찾아다니며 병사들을 격려하고 위문하는 일에 한동안 투신했다. 그 육군군가 보급단의 모체가 바로 서울가톨릭합창단이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하대응 선생은 전쟁 중 대구 남산여고 교사를 지내다가 1953년 휴전 후 효성여대(현 대구가톨릭대) 교수로 부임한다. 그리고 1980년 퇴임 때까지 대구지역의 수많은 음악인재를 육성하는 데 큰 디딤돌이 됐다.

◇이영진 음악평론가

하대응 선생의 역할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그는 경북예총을 발족시킨 장본인이고, 초대 한국음악협회 경북지부장을 역임했을 정도로 대구의 음악 발전에 관한한 항상 선봉장이었다.

‘대구지역 서양음악의 큰 공로자’, ‘대구음악계 발전을 중추적으로 이끈 선도자’ 등 하대응 선생을 수식하는 표현이 여럿 있지만, 정작 그에게 합당한 표현은 ‘성악가 겸 작곡가 하대응’이다. 여러 차례 언급했지만 하대응 선생의 전공은 작곡이 아니라 성악이다. 그가 1950년대 효성여대 교수로 부임할 당시의 전공도 성악이고, 또 퇴임할 때까지의 지도과목도 성악이었다.

효성여대 제자였던 김귀자(전 경북대 교수)의 증언에 의하면 1964년 무렵 ‘하대응 문하생’ 발표회 때 하 선생님의 노래를 직접 듣고, 그 아름다운 미성(美聲)에 감탄했던 기억이 지금까지 잊히지 않는다고 했다. 그런 그가 오늘날 성악가로 인식되기보다 작곡가로 세간에 알려짐은 필경 어떤 사연이 있을 것이다.

2013년 ‘음악춘추’ 5월호에 실린 하대응 선생 관련 대담 기사에 의하면, 그와 인간적 친분이 두터웠던 남세진 전 대구교대 교수의 증언이 매우 설득력 있게 들린다.

‘어느 날 하 선생님과 해수욕장에 가게 됐어요. 평소 술을 전혀 못 하시는 줄 알았던 선생님이 그날 술을 많이 하셨는데 공교롭게 선생님 몸에 큰 수술 자국을 보게 됐습니다.... 그때 선생님이 그런 말씀을 하셨어요. 내가 건강이 안 좋아서 노래 부르는 걸 그만 뒀어요.’

홍천 출신으로 일제강점기 강원도 최초의 일본 음악 유학생이었던 하대응 선생은 전(全) 일본 성악콩쿠르에서 2위에 입상해 장래가 촉망됐던 미성의 테너였지만 건강상의 이유로 성악가의 길을 접고 음악교육자로 때로는 작곡가로 자신의 음악 역량을 불태우다가 1983년 5월29일 선종(善終)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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