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인의 퇴직 기념으로 몇몇 분이 설악산 대청봉(1,708m)에 간다기에 나도 끼어 달라고 했다. 높고 험한 산이란 것을 익히 알고 있었으나 언젠가 자그마한 자매님이 환갑이 넘은 나이에 다녀왔다고 자랑하시던 모습이 떠올라 가보고 싶었다. 힘들 것 같으면 올라가지 않고 산 아래에서 단풍 구경을 하며 놀고 있겠다고 했다.
산행길이 네 곳이 있는데 그중에 가장 가파르고 힘드나 하루 만에 다녀올 수 있는 오색 코스(5㎞)로 정했다. 정상까지 가는 데 4시간 걸린다고 한다. 일행은 춘천에서 차로 새벽 4시에 출발했다. 추억이 담긴 한계령 휴게소를 지나 오색지구에 주차했다. 신선한 공기와 단풍이 무르익은 설악산을 마주하니 힘이 절로 솟았다. 입구에 들어서자 시작되는 가파른 돌계단은 한치의 에누리 없이 이어졌다. 한 발 한 발 디디며 기도하고 속죄도 하고 아픈 이의 고통을 헤아려 보았다.
설악폭포가 나올 때 즈음이 나의 적정 등산 거리였다. 아직 반도 못 왔다는 것에 맥이 빠졌다. 되돌아가기에는 너무 많이 올라왔다. 남은 길이 온 길보다 그나마 덜 힘들다는 말에 힘을 얻었다. 이제부터는 어쩔 수 없어 가는 거다. 아침 먹은 것이 체했는지 가슴이 답답하고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50여m를 남겨두고 그냥 주저앉았다. 한바탕 풍파가 지나가고 일행의 부축으로 정상에 올랐다.
대청봉! 환성이 절로 터졌다. 노래지던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파란 하늘 맑은 날, 훤히 트인 동해안, 양양 강릉 속초 장난감 같은 도시들, 내려다보이는 설악산 능선, 비행기에서 보는 것과는 비교가 안 된다. 노력에 따른 성취감, 그 환희에 꺼이꺼이 올라가는 것 같다. 증표 사진을 찍으려고 줄을 섰다. 누가 주인이 아니랄까 봐 찬 바람이 세차게 텃세한다. 새로 산 등산 모자는 괜찮다만 내 몸이 절벽으로 날릴까 겁났다. 그래그래, 겸허해진다.
눈도장도 잠시, 하산할 시간이 됐다. 기괴한 고목과 멋진 단풍 숲이 유혹하나 내 코가 석 자인지라 신경은 온통 발 무릎에 쏠렸다. 산허리쯤 되는 폭포가 나왔고 체력의 한계는 여기까지였다. 몇 번이고 주저앉아 토하고 또 토하며 소화돼 내려가는 것까지 호출했다. 해가 지는가 하더니 금세 어두워졌다. 남은 500여m는 까마득했다. 난간 통나무를 다리 사이에 두고 줄을 잡고 뒤로 미끄러지며 내려갔다. 100여m를 남겨놓고 그것마저 끊겼다.
갑자기 불빛과 함께 119 구조대가 나타났다. 어떤 하산객이 연락했다는 것이다. 천사가 아닐 수 없다. 젊은이가 양쪽에서 부축해 주는데 눈물겹게 든든했다. 내려오자마자 돌바닥에 털퍼덕 드러누웠다. 그 편안함을 칠성급 호텔에 비할까. 누구는 눈 감으면 죽는다고 뜨라고 했고 누구는 뭣 모르고 등산했다고 나무라는 소리가 들렸다. 무식해서 용감했다. 그러나 죽기 전에 한 번 해볼 만한 경험이었다.
쉽게 다녀왔다면 대청봉이라 할 수 있겠나. 며칠이 지났지만 아직도 팔다리가 풀리지 않았다. 되돌아보니 감사한 것만 생각난다. 대가 없이 베풀어 준 아름다운 사랑, 지르밟고 가도록 허락해 준 산 그리고 지킴이, 사고에 대비하고 있는 구조대, 염려해 준 등산객, 그리고 함께해준 일행에게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