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법정 칼럼] 유시유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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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순건 춘천지방법원 판사

◇홍순건 춘천지법 판사

새해 벽두에 솟아오른 웅장한 태양의 모습이 아직은 기억에 선명하게 남아 있다. 으레 그렇듯 당찬 다짐과 함께 새로운 꿈을 꾸면서 새해를 맞이하는 사람들이 많다. 달력에 따르면 새해는 응당 1월에 맞이하지만, 법원의 달력은 그것보다 조금 느리다. 법원 안에서는 희망을 품고, 각오를 다지기에 1월은 때가 이르다. 재판부의 구성, 담당 사무는 통상 1년 단위로 편성되고 매년 2월 중순을 기점으로 새로운 재판부가 구성되며 담당 사무 역시 그에 맞추어 변경된다. 법원의 새 시작은 사실상 매년 2월 중순부터다.

해가 바뀌어도 같은 사무 분담을 맡는 판사라면 마무리 문제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지만, 많은 판사들은 매년 2월 중순을 기점으로 사무실을 옮기거나 타 지역으로 이사를 간다. 따라서 1월은 한 해의 새 시작이라는 들뜬 마음이 들면서도 2월 중순에 있을 사무분담의 변경, 인사이동을 앞두고 그동안 맡아온 재판의 갈무리를 위해 대부분의 판사들은 그 기간을 최고도의 피로도와 긴장감 속에서 돌관공사를 하듯이 사건 해결에 매진한다.

1월 말에서 2월 중순까지 사이에 판결 선고가 이루어지는 사건 중에는 법조계 은어로 이른바 ‘깡치 사건’이라고 불리는 사건이 많다. 쟁점이 복잡다기하여 한눈에 쟁점을 정리하는 것부터 난감한 사건, 수십 권에서 수백 권에 이를 정도로 자료가 방대한 사건, 여러 방면으로 관련 사건이 걸쳐 있거나 수년 씩 사건이 진행되다가 마침내 변론이 종결되어 판결 선고만을 앞두고 있는 완숙한 사건 등을 깡치 사건이라고 부르곤 한다. 깡치 사건이 없는 재판부는 없다. 재판부마다 이러한 괴로운 사건을 1~2년씩 살펴보고 있고, 담당 판사의 마음 한 구석에는 부담감이 늘 자리하고 있다.

자기 사건이 깡치가 되면 당사자들도 여러 차례의 재판과 지난한 시간, 치열한 공방 속에 지칠 대로 지쳐있다. 당사자들은 법정에 나와 언제 재판이 끝나느냐며 성토를 하기도 한다. 심리가 종결되는 순간 판결 선고를 제외하고 재판 자체가 끝났다는 사실에 사건 관계자들은 해방감을 느끼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그 해방감을 뒤로 하고 당사자들은 깡치 사건이 되어버린 자신의 사건이 어떻게 판결이 나올지 학수고대한다. 깡치 사건을 맡아 본 변호사나 검사로부터 사건 심리가 끝나면 그 괴로운 사건이 어떻게 판결이 날지 당최 종잡을 수 없다는 말을 들은 적도 있다. 심리를 마칠 무렵 판사도 대강의 심증만 형성할 뿐 심리 종결 후 사무실에 앉아 깡치 사건의 기록 속에 파묻혀야 비로소 결론의 실마리를 겨우 찾을 수 있다.

다만, 깡치 사건이든 아니든 심리를 마친 사건은 특단의 사정이 발생하지 않는 한 심리를 진행한 판사가 판결을 선고하는 것이 원칙이다. 판사가 심리를 마쳐놓고, 인사이동을 이유로 후임 판사로 하여금 판결문을 작성하게 할 수는 없다. 본인이 보았을 때에도 복잡하고 어려운 사건이 다른 판사를 만났다고 하여 갑자기 명쾌하고 수월하게 해결되는 사건으로 탈바꿈을 할 리 없다. 그리고 이러한 원칙을 도외시하는 판사는 없다. 본인에게 깡치 사건이 있는지 불만을 가지지도 않는다. 단지, 깡치 사건일지언정 심리가 끝나면 사건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판결을 선고하여야 한다는 책임감, 최대한 신속하게 재판을 진행코자 하였음에도 상당한 시간이 흘러 당사자들을 애타게 한 미안함, 후임 판사를 위한 배려와 같은 무거운 감정들 속에서 인사이동 전에 판단해내겠다는 의지로 깡치 사건의 판결문을 한 글자씩 꾹꾹 눌러 적는다. 그렇게 전국 법원은 1월 말에서 2월 중순 사이를 분망하게 보내고, 새로운 사무와 함께 시작을 맞이한다.

이렇게 선고된 깡치 사건의 결론은 당사자가 희망하거나 예상한 결론과 들어맞을 수도 있다. 그러나 지난한 재판 끝에 당사자가 예상치 못 한 결과, 패소의 결과를 받을 수도 있다. 깡치 사건일수록 당사자가 원하는 내용으로 판결 선고가 되지 않았을 때의 당사자가 느낄 그 좌절감과 실망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사건의 접수 단계에서부터 선고 단계까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각각의 판사가 증거와 법률에 따라 유시유종의 자세로 최선을 다해 곱씹고 되새기며 고민한 끝에 내어 놓은 결과라는 말만큼은 전해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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