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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칼럼]우리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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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찬년 춘천지방법원 속초지원 판사

재판장은 검사의 의견을 들은 후 피고인과 변호인에게 최종의 의견을 진술할 기회를 주어야 한다. 판결 선고로 재판을 끝맺기 전 피고인에게 마지막으로 할 말을 할 기회를 주는 것이다. 이때 ‘열심히 살겠다.’는 말을 종종 듣는다. 공무원이 직무수행을 거부하여 저지르는 직무유기죄나 어떠한 나쁜 결과 발생을 막을 책임 있는 사람이 그 책임을 다하지 않고 방관함으로써 그러한 결과발생을 초래하는 경우 성립하는 부작위범과 같은 경우가 아니고서야, 열심히 살지 않아 형사재판을 받는 사람은 없을 텐데, 판사에게 마지막 심경을 토로하는 말로 열심히 살겠다는 뜻을 전하는 사람이 적지 않은 것은 새삼스러우면서도 낯설다.

그저 우리 식구 위해 내 한 몸 부서지도록 열심히 사신 부모님의 남루하지만 거룩하신 모습, 그 모습에 꼭 보답하겠다고 다짐하는 마음으로 살던 때가, 우리의 그리 먼 지난날이 아니어서 일까. ‘열심히’라는 말을 들으면 괜히 숙연해지기도 하고, 그저 마음 놓고 믿어주고픈 감정이 일기도 한다.

그런데 정작 큰 문제는 너무 열심히 살아서 발생한다. 바쁜 와중에 사람들 챙기려 함께 술 마시고 다음날 아침 일찍 열심히 일터로 나가려다가 술이 덜 깨 음주운전을 하게 되고, 조만간 돈을 융통할 수 있을 예정이니 일단 어려운 사정은 감추고 남의 돈을 빌리거나 다른 사람에게 공사를 맡기는 등으로 사업 한 번 열심히 해보려다가 결국 예상과 달리 그 돈 융통할 수 없게 되어 사기범으로 몰리기도 한다. 피도 눈물도 없는 법은 내가 죄인이라고 하는데, 나는 열심히 산 죄밖에 없으므로, 법정에서 자백은 하더라도 여전히 억울한 마음이 크다. 결국, 열심히만 살아서는 낭패 보기 십상이다.

작가 유발 하라리의 말처럼, 인간이라는 종이 다른 생물들보다 이렇게 번성할 수 있었던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걸 공통으로 믿을 수 있는 힘이 있었기 때문이다. 예전만 못하지만 거대 종교는 여전히 굳건하여 우리 삶의 여러 부분을 아우르고, 과거 한반도에 살던 사람들도 다 같이 곰을 숭배하고 천제의 손자인 단군을 따르기로 하면서 힘을 모아 이 터전을 지켜낼 수 있었다. 그러한 믿음이 없었다면 인간은 뿔뿔이 흩어져 사나운 육식동물의 먹이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법 역시 그러한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이다. 세상에 원래 있던 법은 없다. 함께 지키기로 정하고 따르면 모두에게 골고루 유익할 것이라는 믿음에서 법은 탄생했다. 다른 사람의 음주운전으로 인한 피해자가 나나 내 가족일 수 있으므로 나 역시 음주운전을 하면 안 되고, 사기꾼들이 넘쳐나면 누구든지 쉽게 타인을 믿고 투자할 수 없으므로 돈을 빌리는 데 너무 많은 담보가 필요하거나 돈이 돌지 않아 우리 경제는 서서히 무너지고 그 피해는 모두에게 전가된다. 법의 실패는 결국 법을 믿는 입장에서 이탈하여 ‘우선 나부터 살고 보자. 그게 남는 장사.’라는 믿음을 좇는 사람이 늘어날 때 초래된다.

권위주의가 자리를 내어준 뒤 모든 가치기준이 재산의 많고 적음으로 수렴해간다는 인상이 강해지는 요즘, 우리 모두 반칙하지 말자는 말이 물정 모르는 사람의 소리로 들리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래도 법이라는 상상력의 산물을 따르지 않으면 결국 문명은 퇴보하고 그 피해는 모두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은 단언할 수 있다. 법이 수호되는 상태는 값진 공공재다. 사사로이, 필자의 인생에서 대부분의 시련은 결국 정직하지 못한 결과였음을 고백해 둔다.

어떻게 살고 일하여야 법에 대한 신뢰 회복에 미력이라도 더할 수 있을지 고민은 깊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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