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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대경]다시 보는 겨레의 스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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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항교 道 문화재위원 문학박사

하늘이 이 나라에 끊어진 성학(聖學)을 전하려 율곡을 내려보낸 지 올해로 488년이 되고, 성인이 닦아 놓은 학문을 바탕으로 치평(治平)의 대도(大道)를 실천함에 몸 바쳐 진흙에서 피어난 연꽃과 같이 받들리다 동천(洞天)으로 돌아간 지는 440년이 된다.

율곡이 49세로 죽자 당시 선조 임금은 “하늘이 나에게 인재를 주시고 어찌 이토록 빨리 빼앗아 가는가!”라고 슬퍼했고, 송강 정철은 “피리를 불려니 구멍이 없는 것 같고, 거문고를 타려니 오동판이 없는 것 같다”고 탄식했다. 올해는 인조 임금이 율곡에게 “도와 덕을 널리 들어 막힘이 없이 알았고, 백성의 편안한 삶을 위하여 정치의 근본을 세우는 데 평생을 바쳤다”라며 문성(文成)이란 시호(諡號)를 내린 지 400년이 되는 해다.

율곡은 유가 철학 이론을 꽃피운 성리학자로, 민생을 위해 태평을 열어 주기로 일생을 바친 관료이자 정치가로, 하늘이 낸 효자로, 인간의 참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며 실천하고 떠난 인물이다. 집이 오래되면 서까래가 썩고, 기와가 내려앉듯 왕조(王朝)도 창업하여 200년이 지나면 붕괴의 길을 걷는다는 역사의 흐름을 꿰뚫고, 구태에 젖어 헤어나지 못하는 지배 세력을 쫓아내고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제하려 바른말을 일삼다 아홉 차례나 벼슬을 내려놓기를 거듭하며 개혁을 부르짖었으나, 무능한 임금에 빌붙어 당쟁을 일삼는 패거리들로 인해 뜻을 이루지 못했다.

당시 율곡은 붕당(朋黨)정치로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참다못해 “이처럼 동·서 진영으로 나뉘어 싸우다가는 10년이 못 가 흙이 무너지고, 기왓장이 깨지는 화를 면치 못할 것이니, 10만 병사를 양성하여 대비하자”라고 목청을 높였으나, 호의호식하며 향락을 누리던 대신들은 “태평성대에 범을 기르자는 것”이냐며 비아냥거렸다. 결국 귓전으로 흘려듣다 율곡이 서거한 지 8년 만에 임진왜란이 일어나 임금이 백성을 버리고 피난 가는 꼴을 겪기도 했다.

오늘날 백성을 위하라고 뽑아 놓은 집단은 정쟁(政爭)에만 몰두하고, 임금을 보좌하는 역대 대신들은 현실에만 안주하다 결국 인구소멸, 의료대란 같은 상황을 초래했으니, 이는 지금까지 조정에 율곡 같은 인물이 없었기 때문이다. 1788년 정조 임금은 율곡이 지은 ‘격몽요결’을 읽고 “문성공 같은 신하를 옆에 두고 정사를 같이 보지 못해 아쉽다”라고까지 했다.

율곡 사후 40년 뒤인 1624년 임금이 시호를 내리자 그동안 율곡의 유훈과 업적을 선양하고 추모할 수 있는 공간이 없음을 안타깝게 여긴 공조참의 김몽호와 사헌부감찰 이상필이 지역 유림과 의논하여 서원(書院) 건립을 추진하기로 뜻을 모은 지, 올해로 400주년이 된다.

지난해 송담서원(松潭書院) 보존회원들이 서원 창건 400주년을 기념하여 비를 세웠고, 이를 계기로 올해에는 율곡 얼 선양을 위해 다양한 사업을 추진한다고 한다. 한 고을에서만 추앙하는 인물이 아닌 겨레 전체가 추앙하는 인물인 만큼 소모성 1회 행사가 아닌 지속 가능한 참된 얼 선양사업으로 이어지기를 응원하며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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