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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한서 남궁억 선생 서거 85주년을 추모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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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대영 한서남궁억독립운동사 연구회장


서슬 퍼런 일제 강점기
목숨 걸고 애국 활동
높은 뜻 기려 선양해야

4월5일은 한서 남궁억 선생이 돌아가신 지 85년이 되는 날이다. 1863년 12월, 고종이 즉위하던 해에 태어나 광복을 불과 6년 앞두고, 일본 제국주의 검경(檢警)의 극심한 고문과 감옥에서의 취약한 섭생(攝生)으로 인해 건강을 잃고 석방되신 후 홍천 서면 보리울로 돌아오셔서 ‘내가 죽거든 무덤을 만들지 말고 과목 밑에다 묻어서 기름이나 되게 하라’, ‘나는 독립을 못 보고 너희들은 볼 것이니...’ 하는 유언을 남기고 1939년 4월, 소천하셨다.

한서 남궁억 선생은 조선 말기, 대한제국, 일제강점기라는 혼란의 시기를 살면서 어떤 환경에 처하더라도 대한독립의 신념을 잃은 적이 없었다. 선생은 독립운동의 위대한 업적을 남기셨음에도 불구하고 ‘모곡학교를 세우고 무궁화를 전국에 보급하셨다’라는 정도의 총론만 알려져 있고 각론에 대해서는 많이 알려지지 않아 매년 4월 만 되면 가슴이 아프다.

남궁억 선생의 독립운동을 몇 가지로 유목화하여 살펴보자.

첫째는 독립단체 활동이다. 독립협회, 대한협회, 관동학우회, 황성YMCA 등의 활동을 하셨다. 둘째는 언론 활동이다. 독립신문 영문판 편집장, 황성신문 초대 사장, 대조선독립협회회보 편집장, 대한협회회보 등의 발간에 참여하셨다. 셋째, ‘무궁화’를 통한 활동이다. 배화 학당에서는 무궁화 한반도 수놓기 지도(指導), 삼동주 태극기 수놓기 지도(指導) 등을 하였으며, 보리울에서는 무궁화 묘목 수십만 그루를 길러 전국에 보급하였다. 넷째 교육을 통한 활동이다. 흥화학교 교사, 현산학교 설립·교사·교장, 황성 YMCA 야간부 교사, 배화학당 교사, 상동청년학원 교사·원장, 모곡학교 설립·교사·교장, 춘천시 남면에 후동의숙 설립 등 교육을 통하여 독립 애국정신을 함양하였다. 다섯째, 저술·장학 활동이다, 통신강의록인 교육월보 발간, 조선문법, 가정교육, 신편언문체법(서예 교본), 조선어 문법, 동사략, 조선이야기, 조선어 보충 등을 저술하여 교과서로 활용하였다. 여섯째, 애국 민족의 예술가였다. 서예가, 가야금 및 하모니카 연주, 교가 작사, 애국 노래 작사, 찬송가 작사, 시 및 시조 작시(作詩) 등 종합예술가였다. 무엇보다도 1906년 양양군수로 재직할 때 전춘회(餞春會) 장소에서 지은 ‘설악산’ 시조는 우리나라 최초의 현대시조로 알려져 있다. 일곱째, 종교를 통한 활동이다. 황성기독교청년회(YMCA) 회원·이사, 종교교회 본처 전도사, 모곡교회 창립, 후동교회 창립 등의 활동을 하였다. 여덟째 사회 활동이다. 민간 대학건립기성회 발기위원, 한·일 YMCA대회에 한국 대표로 참석, 조선 민립대학기성회 회원, 이충무공유적보존회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아홉째, 농촌계몽 운동이다. 양양에서는 대규모 조경사업, 모곡에서는 농촌생활 개선운동, 사랑방에서 소득 증대 운동 등 1970년대 새마을 운동을 1920년대에 싹 틔웠다.

남궁억 선생은 1933년 10월4일 무궁화동산 조성으로 민족정신을 함양하고 조선 역사를 가르쳐 애족애국심을 함양한다는 죄목으로 홍천경찰서에 구속되셨다. 1943년 7월30일 심신이 쇠약해지자 병보석으로 석방되었으며, 병보석 상태에서 1935년 1월31일 징역 1년 집행유예 3년의 형을 받았다. 그 후 보리울로 내려오셨으나 학교도 무궁화동산도 모두 사라졌을 뿐만 아니라 구속 후유증이 심하여 시름시름 앓으시다가 1939년 4월5일 보리울에서 별세하셨다.

이 모든 것이 일제의 서슬이 퍼런 상황에서 목숨을 걸고 활동하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로서는 감히 생각할 수도 없는 엄청난 일들을 하신 남궁억 선생님을 우리는 좀 더 깊이 연구하고 그분의 높은 뜻을 기리는 다양한 방법을 찾아 선양해야 한다.

가신 지 85년. 선생의 85주기를 맞이하여 다시 한번 선생의 크고 높은 애국애족의 뜻을 기린다. 선생님, 편히 쉬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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