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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중언] ‘영수회담’

한국 정치에서 ‘영수회담’이란 대통령과 제1야당 대표의 양자회담을 의미한다. 우리나라 첫 영수회담은 1965년 7월20일 박정희 대통령과 박순천 민중당 대표최고위원 간에 열렸다. 가장 유명했던 영수회담은 1975년 5월21일 박정희 대통령과 김영삼 신민당총재 간 만남이다. YS는 회고록에서 김 총재가 먼저 육영수 여사에 대한 조의를 표하자 박 대통령이 창밖의 새를 가리키면서 “내 신세가 저 새 같습니다”라며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았다고 했다. ▼그 자리에서 김 총재가 유신철폐와 민주화를 제안하자 박 대통령은 영구 집권에 대한 욕심이 없다고 하며 시간을 달라고 했다고 한다. 김 총재는 대통령의 눈물과 진심을 믿었으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YS는 회고록에서 속았다고 술회했다. 또 박 대통령은 김 총재에게 “이 이야기는 우리 둘만의 비밀로 합시다”라고 요청, 회담 내용이 공개되지 않아 밀약설이 돌면서 YS가 정치적 위기에 몰리기도 했다. 그러나 투옥됐던 민주화 운동 정치인 일부 석방 등 어느 정도 성과를 거뒀다. ▼영수회담에 가장 적극적이었던 지도자는 김영삼, 김대중 전 대통령이었다. 김영삼 정부에서는 10차례, 김대중 정부에서는 8차례 영수회담이 열렸다. 박정희·박순천 간 회담에서는 임시국회를 소집해 한·일 협정 비준안과 베트남전쟁 파병 동의안을 다루기로 합의했다. 1987년 6월24일 전두환 대통령과 김영삼 민주당 총재의 영수회담은 정국의 주요 분기점이 됐다. ▼어렵게 윤석열 대통령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영수회담이 성사됐다. 오랫동안 기다려온 회담이라 기대가 크기도 하지만 첫 회동인 만큼 큰 성과를 얻기 어려울 수도 있다. 양자회담의 경우 대화가 밀도 있게 진행될 수는 있지만 중재자가 없으면 자칫 회담이 경색되고 회담 내용을 놓고 서로 다른 말을 할 가능성도 있다. 특히 결과물이 없다면 더 공격받기 쉽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두 지도자가 자주 만나 민생과 국가의 발전을 위해 소통하는 자리를 계속 이어가 주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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