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보=본보가 최초 보도(2024년 4월16일)해 화제를 모은 최좌해 초상화의 화풍과 관련해 “조선 후기 초상화 연구의 기준작이 될 수 있는 작품으로 국가지정문화재급의 가치를 지닌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지난 12일 국립춘천박물관 대강당에서 열린 춘천 수성최씨 가문 소장 최좌해 초상화 및 고문서 가치연구 포럼에서 민길홍(문화체육관광부) 박사는 ‘이명기·김홍도 필 최좌해 초상의 미술사적 가치’를 주제로 한 발표에서 “화가, 제작 시기, 대상 인물까지 모두 문헌과 실물을 통해 확인되는 매우 드문 사례”라며 이같이 밝혔다. 최좌해(崔左海·1738~1799)는 조선 후기 춘천 지역에서 학문과 강학에 전념한 문인으로, 관직에는 나아가지 않고 지역사회에서 학덕을 쌓은 인물이다. 그의 저술은 무려 61책에 달하고, 문하에는 다수의 문인이 배출되었으며, 오늘날에도 ‘연정처사’라는 호칭으로 문중에 회자된다. 수성최씨 가문에는 최좌해와 그 아들 최윤수의 초상화 총 7점이 전해지고 있다. 이 중 최좌해의 족자 형태 전신좌상 2점은 비단에 그려진 완성본이며, 반신상 3점은 종이에 그려진 초본 형태다.
특히 주목할 점은, ‘내암유사(고려대 도서관 소장본’)에 “무오년(1798년) 9월, 화사 이명기가 얼굴을, 김홍도가 몸체를 그렸으며 장황은 방효량이 맡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민 박사는 “이명기의 화풍이 그대로 드러나 있고, 김홍도의 초상화 참여 사실이 문헌으로까지 증명되는 유일한 사례로서 학술적 가치가 매우 높다”고 평가했다. 또 최좌해 초상은 두 손을 모으고 바닥에 앉은 전신좌상으로, 유학자의 정체성을 강조한 도상으로 해석된다. 이는 전통적인 임금이나 관료 중심 초상에서 학자 중심 초상으로 넘어가는 조선 후기 산림정치의 흐름과도 연결된다. 민 박사는 “이 초상화는 단순한 인물화가 아니라, 당시 지역 명문가의 위상과 정조 대 궁중 화원들의 협업 구조, 그리고 조선 후기 초상화의 제작 방식과 도상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사례”라고 강조했다. 한편 이날 포럼에서는 최좌해 초상화 이외에도 최좌해의 학문과 활동, 수성최씨 가문이 보관 중인 고문서 내용 연구 등에 대한 논의가 이어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