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궁벽하게 사노라니 사람 보기 드물고/ (…)/ 병이 많아지니 잠도 줄어들어/ 글 짓는 일로 수심을 달래 본다/ 비가 오래 내린다 해서 괴로워만 할 것인가/ 날 맑아도 또 홀로 탄식할 것을.” '여유당전서'에 수록돼 있는 정약용의 '구우(久雨, 장마)'다. 권세와 지체를 내려놓은 서생의 처지에서 맞은 장마철 생활이 암담하다. 도탄에 빠진 민생을 보살필 방책이 절실함을 읽게 한다.
▼ 요즘이 장마철이다. 하지만 올해 장마는 유별난 현상을 보여 종잡기 어렵다. 우선 첫 장맛비부터 기이했다. 남쪽에서 발생해 북상했던 예년과 달리 중부지방에서 먼저 장마전선이 형성됐다. 그러더니 이내 빗줄기는 부실해지고 무더위를 동반한 '마른장마'가 맹위를 떨쳤다. 영동지역 저수지들이 여전히 바닥을 보이고 있다는 소식이다. 그런가 하면 남부지방과 중부지방의 날씨가 상반된 '반쪽 장마' 패턴이다. 낮에는 폭염, 밤에는 폭우가 쏟아지는 '야행성 장마'도 헷갈리게 한다.
▼ 들쭉날쭉한 장마여서 도종환의 시 '우기(雨期)'가 더 실감나게 느껴진다. “(…)/ 하늘에서 땅끝까지 적시며 비는 내리고/ 소리 내어 울진 않았으나/ 우리도 많은 날 피할 길 없는 빗줄기에 젖으며/ 남모르는 험한 길을 많이도 지나왔다/ 하늘은 언제든 비가 되어 적실 듯 무거웠고/ 세상은 우리를 버려둔 채 낮밤 없이 흘러갔다/ (…).” 세상살이가 간단치 않은데 날씨조차 아랑곳없다는 듯 지나치는 모습이 아닌가.
▼ 기상이변처럼 정국도 혼란스럽다. 국가정보원 대선개입 의혹 사건에 노무현 전 대통령의 남북정상회담 당시 서해 NLL(북방한계선) 발언 논란이 정국을 휘감고 있다. 여기에 가려 경제민주화 법안과 지방선거 정당공천 폐지 공약은 언제 그랬냐는 듯 빛이 바래가고 있다. '화불단행(禍不單行)'이라 했다. 불행은 하나로 그치지 않고 잇달아 온다는 것이다. 장마 후 마른날까지 걱정해야 하는 형편이다.
용호선논설위원·yonghs@kw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