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일반

[문재인 대통령 당선]실향민 아들→인권변호사→노무현의 동반자→광화문 대통령

문재인 당선자 누구인가

◇강제징집 후 특전사 근무 시절.변호사 시절 사무실에서 사진 촬영.노무현 대통령 비서실장 시절 대화 나누는 문 당선자.2012년 고성 22사단 GOP부대 방문.2017년 춘천에서 한 표를 호소하는 문 당선자.강원일보DB.연합뉴스제공

경남 거제 시골 농가 장남으로 출생 … 대학 시절 유신 반대 운동 뛰어들어

강제 징집 특전사 복무 사법고시 차석 수료에도 시위 전력 변호사 길 걸어

노무현 전 대통령 참여정부의 핵심 … 18대 대선 낙선 후 19대 대선서 독주

■실향민의 아들 … 특전사 출신=문재인 대통령은 1953년 1월24일 경남 거제의 시골 농가에서 2남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함경남도 흥남이 고향이던 부모가 6·25전쟁 발발 후 1950년 12월 '흥남 철수' 때 잠시 난을 피한다는 생각으로 월남한 것이 남한 정착으로 이어졌다. 실향민의 아들인 것이다.

가난한 집안형편에도 부산의 명문인 경남중·고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뒀다. 하지만, 중·고교 때 별명이 '문제아'였을 정도로 문제학생이기도 했다. 실제로 술·담배를 입에 대고 4번의 정학을 받았다. 문 대통령은 고교 시절을 두고 “이름 때문에 '문제아'라는 별명이 붙었는데 나중엔 실제가 됐다”고 우스개 소리를 하기도 한다.

재수 끝에 경희대 법학과에 전액장학생으로 입학했다. 대학 시절에는 '반유신' 투쟁에 나선 운동권이었다. 1972년 유신 반대운동에 뛰어들어 1975년 학생회 총무부장으로서 시위를 주도하다 징역 8월, 집행유예 1년을 선고받고 학교에서도 제적됐다.

석방과 동시에 강제징집돼 특전사 수중폭파요원으로 복무했다. 군 복무 시절 폭파과정 최우수, 화생방 최우수 표창을 받는 등 특A급 사병으로, 1976년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 때 미루나무 제거조에 투입될 정도로 '정예용사'였다. 이 같은 군 이력은 이번 대선에서도 문 대통령의 '투철한 안보관'을 표현하는 데 효과적으로 활용되기도 했다.

1978년 제대 이후엔 갑자기 돌아가신 아버지에게 '한 번이라도 잘되는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다'는 책임감에 사법고시 공부를 시작, 이듬해 1차에 합격했다. 그러나 1979년 부마항쟁과 10·26, 1980년 '서울의 봄'을 거치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또다시 구속돼 2차 시험 합격 소식은 유치장에서 들었다. 사법연수원 시절, 현 아내인 김정숙씨와 결혼해 문준용씨 등 슬하에 1남1녀를 낳았다.

■노무현 전 대통령과의 인연으로 정치 시작=문 대통령의 인생은 1982년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과 인연을 맺으면서 '제2막'을 맞는다. 사법연수원을 차석으로 수료해 판사를 희망했지만, 시위 전력 탓에 좌절됐다. 변호사 길을 작정하고 부산으로 내려간 그가 만난 사람이 노무현 변호사였다.

첫 만남에 의기투합한 두 사람은 동업을 결정했다. 깨끗한 변호사를 해보자며 합동법률사무소를 차린 그들은 관행이었던 사건 알선 브로커를 끊고 판검사 접대도 하지 않았다. 그는 저서 '운명'에서 “각종 인권, 시국, 노동 사건을 기꺼이 맡다 보니 자연스레 우리는 인권변호사의 길을 걷게 됐다”고 술회했다.

인권변호사로 활동 중 6월 항쟁이 발생, 1987년 5월 부산국본(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이 결성됐고, 이때 노무현 변호사가 상임집행위원장, 문 후보가 상임집행위원을 맡을 정도로 부산 민주화운동을 주도했다.

이후 1988년 4월 노무현 변호사는 13대 총선에 출마해 정치권에 진입했다. 문 대통령은 부산에 남아 노동 관련 사건 변호나 노동운동 지원 일에 매달렸다.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된 2002년, 대선 경선 때 그는 노 후보의 부산선대본부장을 맡아 '업무적으로' 다시 결합했다. 당시 노 후보는 “노무현의 친구 문재인이 아니라 문재인의 친구 노무현”이라며 각별한 정을 표현했다. 노 전 대통령의 대선 승리 후 청와대 민정수석, 대통령 비서실장 등 요직을 거치면서 정권의 핵심인물로 떠오르기도 했다.

■제18대 대선 낙선, 그리고 위기 극복=그러나 문 대통령은 2009년 노 전 대통령의 서거 사태 이후엔 정치권과 거리를 뒀었다. 하지만 끊임없이 '역할론'에 시달리다 2012년 4·11 총선에서 부산 사상구에 출마, 19대 국회의원으로 정계에 정식 입문한다. 이후 정치 신인임에도 불구하고 18대 대선에 출마, 100만명의 국민이 참여한 민주통합당(민주당 전신) 국민경선에서 열세번 모두 1등을 차지하며 대선후보로 우뚝 선다. 그의 첫 대선 출마이기도 하다. 당시 통합진보당 이정희, 진보정의당 심상정 후보가 후보직을 사퇴하고 안철수 무소속 후보와도 어렵사리 후보 단일화를 이뤄 야권 단일후보로 18대 대선에 출마했지만,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졌다.

그는 득표율 48.02%(득표수 1,469만표)로 역대 야권 대선후보 최고의 득표율이자 득표수였음에도 불구하고 박 전 대통령에게 몰린 보수층의 결집을 뚫지 못했다. 이후 문 대통령은 칩거생활을 하다가 2015년 2월 민주당 전신인 새정치민주연합 당 대표로 당선돼 다시금 부활했다.

그해 12월, 다음 해(2016년) 총선을 앞두고 새정치연합에 들어와 있던 안철수 의원 등 비문(非문재인)계의 탈당 및 분당 사태로 인해 '정치적 위기'를 맞았지만 이를 '경제민주화의 상징'으로 꼽히는 김종인 전 비상대책위원회 대표를 영입, 총선을 승리로 이끌면서 극복한다. 이때 영입한 총선 인재들은 문 후보의 당 내외 핵심 지지세력으로 꼽힌다.

■더 단단해진 조직, 위기 정면돌파로 해결=박 전 대통령 탄핵으로 치러진 조기 대선에서 당내 안희정 충남지사, 이재명 성남시장 등과 경선을 벌여 압도적으로 승리, 더불어민주당 제19대 대통령 후보로 결정됐다.

그는 2012년 출마 당시 겪었던 문제들을 해결하면서 선거운동을 전개했다. 철저하게 민주당이라는 공조직 중심으로 대선을 치른 것이 대표적인 일이다. 2012년에는 사조직과 당조직이 이원화되면서 선거 패배의 원인으로 꼽히기도 했다. 문 대통령은 선거 초반부터 각종 여론조사에서 1위를 기록하면서 부동의 선두를 이어 나갔다. 각 당의 경선이 끝난 후 한때 국민의당 안철수 후보와 2강이 형성되기도 했으나, 안 후보의 불안한 지지기반이 흔들리면서 4월 중순 이후부터는 독주 체제를 구축, 부동의 1위를 달렸다.

이 과정에서 아들 취업 논란 등처럼 다른 후보 측의 각종 의혹 제기에 대해서는 당이 나서서 반박하고, 본인은 안보와 공약 등에 집중하면서 논란들을 해결해 나갔다. 무엇보다 꼬리표처럼 붙어다니던 '안보불안'에 대해서는 실향민의 자식으로 특전사까지 다녀온 경력, 청와대 재직 당시 북한을 다뤄본 경험 등으로 정면돌파를 해 이를 잠재웠다. 북한 주적 논란 등 TV토론에서의 쟁점들도 모나지 않게 적절히 대응하면서 대세론을 끝까지 이어갔다. 20~30대 젊은층이 많이 참여한 사전투표율이 26%를 넘고, 9일 투표에서도 지지층들의 적극적인 참여로 제19대 대한민국 대통령으로 우뚝 섰다.

서울=유병욱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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