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법정에서 만난 세상]채무자와 채권자의 사정

류영재 춘천지법판사

카드 내역에 한 달에 두세 번씩 모텔을 이용한 기록이 남아 개인회생 기각 결정을 받은 채무자가 있었다. 모텔 이용료가 4만~5만원. 빚에 허덕여 방세 포함 월 90만원으로 5년을 살고 나머지 월급은 전부 빚 갚는 데 쓸 테니 그걸로 남은 빚을 모두 지워 달라는 채무자의 상황을 고려하면 모텔 이용료는 생각보다 큰돈이다. 그러나 가난해도 사랑은 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 모텔 이용료를 지나친 사치로 보아 회생 절차를 이용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부당해 보여 회생 기각 결정을 취소했다.

아버지가 알코올 의존증에 빠져 가족의 생계를 혼자 책임지게 돼 아끼고 쪼개도 이자도 못 갚는 20대 초반 어린 채무자도 있었다. 그는 추후 취업을 생각해 어떻게든 파산만은 피하고 싶었지만 버는 계약직 월급으로는 자신과 미성년 동생들의 최저생활비도 충당하지 못해 결국 회생 절차에 들어오지 못하고 파산으로 밀려났다.

그 외에도 열심히 일해도 무섭게 불어나는 이자에 원금 변제는 꿈도 못 꾸는 채무자, 도박 중독인 남편 때문에 만년 빚 독촉에 시달리다가 이혼을 결심한 채무자, IMF 이후 재기에 실패한 채무자까지 사연 없는 회생·파산 채무자는 거의 없다. 딱한 사정이 강조되다 보니 회생·파산 절차는 갈 곳 없는 불쌍한 채무자들을 돕는 제도로 인식되곤 한다. 그러나 회생·파산 절차는 '불쌍히 여겨 돕는' 제도가 아니다.

반대편엔 채무자만큼이나 딱한 채권자의 사정도 존재한다. 채무자에게 떼인 돈은 하늘에서 떨어지거나 땅 파서 나온 게 아니다. 가끔 채권자가 자신도 돈을 빌려 채무자에게 빌려준 것인데 돈을 갚지 않아 자신의 집이 경매당했다는 등 억울함을 하소연할 때는 심란해진다. 이런 사정을 중심에 놓고 회생·파산 절차는 채무자의 도덕적 해이를 부추기는 제도라고 평가하는 이도 있다. 돈을 빌려갈 때는 언제고 지금 와서 못 갚는다며 배 째라는(?) 채무자를 법적으로 용서해 주는 제도라는 것이다. 그러나 회생·파산 절차는 채무자를 '용서해 주는' 절차가 아니다.

1년간 회생·파산 업무를 담당하면서 회생·파산 절차는 궁극적으로 사회를 위한 제도라는 점을 많이 느꼈다. 채무자를 돕거나 용서해 주는 제도가 아니다. 불법 추심의 가능성만 높아진다. 채무자도 원금은커녕 이자 갚기도 벅찬 생활을 계속하다 보면 사람다운 삶을 살 수 없다.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 가장 큰 피해를 입는 것은 사회공동체다. 죽은 빚을 독촉하고 죽은 빚에 시달리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사회경제가 침체되고 건강한 사회에서 멀어진다. 회생·파산 제도는 결국 사회공동체를 위해 돈 갚을 능력이 없는 채무자를 선별하고 그의 빚에 사망선고를 내려 채무자를 사회에 복귀시키는 것이다.

죽은 빚과 산 빚을 가려내야 하다 보니 회생·파산 채무자에게 재산조사에 성실히 응할 것과 많은 자료를 제때 제출할 것을 요청한다. 채무자에게 돈 갚을 능력이 있는지, 숨겨둔 재산은 없는지 살펴보려면 카드 사용 내역의 은밀한 사생활까지 검토할 수밖에 없다. 채권자에게는 채무자를 용서해 주는 것이 아니라고 설명하기에 바쁘다. 채무자가 돈을 갚지 않아 채권자가 얼마나 고생을 했든 그런 사정만으로 면책불허할 순 없다고 냉정히 말할 수밖에 없다. 채무자와 채권자의 사정이 얽히고설킨 회생·파산 절차는 오늘도 열려 있다. 제도의 취지를 이해하고 과정에서 상처를 덜 받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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