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일반

[3·1운동 100주년 저항의 역사]만세 운동 가장 치열했던 양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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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내 3·1운동의 함성

양양 주민들 군청·경찰서 공격도

도내 만세운동의 출발지는 '철원'

도내 9만9천여명 90여차례 벌여

144명 일제의 총칼에 목숨 잃어

일제에 대한 민족의 저항으로 일어난 3·1운동은 급속도로 전국 각지로 뻗어 나갔다. 도내 첫 만세 운동은 3월10일 철원에서 발생했다. 이어 화천과 홍천 등 도 전역으로 퍼져 갔다. 각 지역 중 가장 치열한 투쟁을 벌인 곳은 1919년 5월까지 만세 운동이 전개된 양양지역이다.

광복회 도지부에 따르면 도내에서는 9만9,000여명의 도민이 모두 90여차례에 걸쳐 만세 운동에 참여했다. 그리고 144명이 일제의 총칼에 숨지고 645명이 다쳤으며 일경에 연행된 사람만 1,250여명에 이른다.

전국 의병 활동의 진원지인 강원도의 3·1운동은 지금껏 알려진 것 이상으로 불타올랐던 것이다.

광복회의 도움으로 도내 주요 지역의 만세 운동을 짚어봤다.

철원에서는 천도교인이 만세 운동을 준비했다. 최병훈이 3월2, 3일 이틀 동안 평강으로부터 독립선언서 200장을 가져와 분배했다. 여기에 기독교 측 청년 단원과 학생 등을 중심으로 3월10일 철원농업학교와 보통학교 학생들, 교회, 지방 청년 등 1,000여명이 참여하는 대규모 만세 운동이진행됐다. 이어 3월18일 철원 장날에 천도교인을 중심으로 독립만세 운동이 펼쳐졌다. 인근 갈말에서는 3월12일 1,000여명이 독립만세운동을 벌였다. 4월8일에는 내문면에서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됐다.

4월 초 독립만세 운동이 진행된 양양에서는 어느 곳보다 치열했다. 4월4일 양양 장날 주민 1,000여명이 양양면과 서면, 손양면 등에서 아침부터 만세 시위를 벌였고 참여자는 시간이 지날수록 늘었다. 밤까지 이어진 만세 운동은 체포자 석방을 요구하는 무력항쟁으로 발전됐다. 주민들이 양양군청과 경찰서를 부수자 경찰이 발포를 시작, 8명이 숨지고 수많은 부상자가 발생했다. 다음 날인 4월5일과 6일 이틀간 양양 도천면과 강현면에서 만세 운동이 진행됐다. 이어 4월6일 또다시 주민 1,300여명이 양양읍으로 몰렸고 경찰서 앞에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4월9일 현북면 만세 운동은 양양지역 만세 운동의 절정이었다. 주민 600여명은 기사문리 주재소를 공격했으며 이때 경찰 발포로 9명이 숨지고 20여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일제 측의 기록인 조선소요사건상황(朝鮮騷擾事件狀況)에 따르면 도내 만세 운동의 주요 참가자는 천도교인과 농민층이었다. 시위 군중에게 습격·파괴된 일제 관서는 경찰관서 4곳, 헌병대 4곳, 군청·면사무소 6곳, 우편소 3곳 등 모두 11곳에 이른다. 일병도 11명이 다쳤다. 비교적 타 지역에 비해 늦게 시작했지만 미리 낫과 괭이, 몽둥이를 비롯, 때론 권총까지 휴대해 지휘자의 명령에 따라 일사불란하고 격렬하게 전개된 특징도 있다. 또 한말 의병 출신이 주동 인물로 활약한 점도 두드러진다. 산간벽지에서 새벽에 도시락을 싸 가지고 50~60리를 걸어와 만세 운동에 참여하는 적극성도 주목할 만한 점이다.

신형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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