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대청봉]납북귀환어부 진상조사·명예회복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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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익기 속초주재 부국장

1,300명 반공법으로 구속

구타·고문 등 가혹행위

석방 후 감시 속 살아가

위험을 무릎쓰고 돌아온

국민 간첩몰아 인권유린

이제라도 진상 밝혀져야

47년 전인 1974년 8월, 초등학교 1학년 여름방학을 마치고 등교한 개학 첫날. 어머니와 비슷한 연배의 담임선생님이 방학 중에 전근을 가시고 20대 여자 선생님이 새 담임으로 부임해 계셨다. 방과 후에 찾아간 당숙모댁 사랑채의 선생님네 살림방도 말끔히 비워져 있었다. 며칠 후 아버지가 동네 어르신들과 막걸리잔을 주고받으시며 조용한 목소리로 나누는 말씀을 통해 ‘선생님의 부군이 간첩이라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는 무시무시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 후 수십년이 흐른 뒤에야 선생님의 부군이 ‘인민혁명당 재건위원회 조작사건'에 연루됐으며 그 때문에 담임선생님은 당시 전체 12학급 규모의 학교에서 더 작은 분교로 강제 전근을 가게 됐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됐다. 선생님의 부군은 8년8개월간 억울한 옥살이를 한 강창덕(95) 4.9인혁열사계승사업회 이사다.

‘2021 실향민 문화축제'가 한창이던 올 6월25일 속초시근로자종합복지관에서는 강원민주재단이 개최한 민주주의 포럼이 ‘국가폭력의 상처와 치유… 동해안 납북귀환어부 인권유린·간첩조작사건'을 주제로 열렸다. 피해자와 가족들은 물론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관계자 등이 참석해 깊은 관심을 보였다. 1954년부터 1987년까지 30여년간 3,600여명의 어부가 납북됐다 귀환했다고 한다. 북한 경비정에 의해 납치됐다는 이유로 이들 가운데 1,300여명이 반공법으로 구속됐다. 당시 수사기관은 구체적 물증이나 혐의도 없이 연행했으며, 구속영장도 없이 30여일에서 6개월 동안 불법 구금한 상태에서 구타, 고문 등 가혹행위를 가해 사건을 조작했다. 이들은 석방 후에도 평생 감시를 받으며 불안 속에 살아야 했으며 연좌제로 인해 가족들은 물론 친지들도 정상적인 생활을 하기 힘들었다. 귀환한 납북어부를 국가가 나서서 간첩으로 내몰고 폭력적으로 인권을 유린한 것은 국가의 정체성을 의심받는 일이다. 자신에 대한 피의자 신문조서조차 제대로 읽지 못할 정도의 사회적 약자인 납북귀환어부들을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했다는 점에서 국가폭력의 양상이 심각한 상황이다.

납북 문제의 근본 원인은 남북한 간의 냉전과 대립구도다. ‘간첩'은 한반도의 분단체계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단순히 먹고사는 생계를 위해 조업하다 실수나 강제로 피랍된 것을 마치 북한에 동조한 것으로 판단한 것은 국민의 인권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잔류하라는 북한의 회유와 협박을 무릅쓰고 돌아온 국민을 간첩으로 몰아 인권을 유린한 것은 국가의 책무를 저버린 것이다.

아직도 납북으로 인해 신체적, 정신적 고통을 겪는 당사자와 가족들이 다수 있다. 피해당사자들 중 상당수가 사망했거나 고령이라 시간이 많지 않다. 피해당사자의 명예회복과 보상이 반드시 이뤄져야 한다. 대한민국이 국민을 보호하고 지켜 주는 민주국가임을 보여 주는 국가 정체성 확립에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인권이 지켜지는 따뜻한 나라임을 국민에게 보여 줘야 한다. 독재정권 시절에 빚어진 인권유린으로 치부하지 말고 지금이라도 국가폭력과 인권유린의 실상을 제대로 밝히는 진상조사가 이뤄져야 한다. ‘납북피해자 보상 및 지원에 관한 법률'에 의해 피해위로금을 지급하고 있지만 대부분의 피해자는 진실화해위원회의 존재조차 모르는 경우가 많다. 피해자 구제방안은 쉬워야 한다. 진실화해위원회만의 활동만으로 문제를 해결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으므로 지방자치단체와 지역사회가 함께 노력해야 한다. 추신. 이 자리를 빌려 ‘간첩 아내'라는 멍에를 쓰고 갖은 고생을 하다 부군이 출소한 지 5년 후 불의의 교통사고로 유명을 달리하신, 나의 첫 선생님인 고(故) 허숙자 선생님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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