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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기획 타임머신 여행 '라떼는 말이야~']

강원일보 창간 77주년

취재사진 현장 속으로

1970년대 집배원의 애환

인스턴트(Instant) 시대다. 바쁘고 또 빠르게 사는 삶에 제대로 적응해야 무탈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이다.

우리는 입버릇처럼 4차 산업혁명이 화두로 떠올랐다고 하고, 자연스레 초(超)연결 시대를 이야기하곤 한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조금 익숙해지나 싶었더니 메타버스(Metaverse) 세상이 도래했다고 시끌벅적하다.

모든 것이 느긋하게 돌아가던 시절을 경험한 이들에게는 이처럼 시시각각 변하는 환경과 제도를 겨우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숨이 턱밑까지 차오를 지경이지만 이미 빠른 속도와 변화, 혁신에 익숙한 세대에게는 그대로 일상인 것이다.

하지만 모든 것이 조금은 느리게 흐르던 시절이 있었다. 안부를 묻기 위해 DM이나 톡을 보내는 것은 상상조차 하지 못하고, 이메일의 존재 조차 모르던 그때. 우리는 직접 쓴 손편지로, 또 엽서로 누군가에게 소식을 알리고, 마음을 전했다. 그 시절 편지는 항상 기다림과 등치관계였다. 편지를 쓰고 빨간 우체통에 넣으면 배달자전거를 타고 한참을 이동해 누군가에게 전해지고 다시 답장으로 돌아오기까지 글쓴이는 초조하게 ‘받은 이'의 처분을 기다려야 했다. 그렇게 받게 된 편지는 글자일 뿐인데도 보낸 사람의 감정들을 읽을 수 있었다. 눈물 자국, 번진 글씨는 편지쓰기 스킬 중 최고였다.

기다림이 환희나 절망으로 바뀌는 것은 ‘집배원'의 등장에서부터 시작됐다. 편지를 기다리는 이는 몇 날 며칠 대문 밖을 하릴없이 바라보고 또 바라봐야 했고, 집배원의 모습이 먼발치에서 보이기라도 하면 득달같이 달려가 자신에게 온 편지를 확인하곤 했다. 그것이 연애편지면 그야말로 애틋했고, 군대 간 아들에게 온 편지면 눈물 났으며, 합격통지서라도 들었으면 기쁨의 감사인사가 여기저기서 터져나왔다. 그리고 그것이 성적표라면 부모님보다 먼저 입수하기 위한 아이들의 온갖 꾀가 다 동원됐다. 물론 이상하리만치 성적표만큼은 사고(?) 없이 부모님에게 잘 전달됐었다.

“혜원아, 이걸 읽지 않는 건 니 자유지만, 이걸 배달하지 않는 건 내 자유가 아니란다.”

영화 ‘리틀 포레스트'에서 주인공 혜원(김태리)이 집배원(박원상)에게 편지를 반송해 달라고 하자 맞받아치며 하는 대사다. 그랬다. 소식을 전하는 것은 집배원이라는 직업의 숙명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우편물이 가득 담긴 수십 ㎏의 가죽 행랑을 짊어지고 장소를 마다 않고 달렸다. 길이 좋지 않던 1970년대는 집배원들의 고충이 더 심했다. 사진은 1974년, 인도계 미국인 시바 아야두라이(Shiva Ayyadurai)에 의해 이메일이 만들어지기 4년 전 세상에 유일하게 소식을 전할 수 있었던 집배원들의 모습을 담고 있다.

사진들은 1974년 4월22일 체신의 날(현재는 정보통신의 날)에 맞춰 강원일보 김근태 기자(현 강일언론인회 회보 편집위원)와 박영택 사진기자(전 강원일보 사진부장·2020년 별세)가 취재를 하며 찍은 것이다. 당시 집배원 생활 1년째인 춘천우체국 소속 신현규(당시 29세)씨의 하루를 동행해 쓴 기사와 사진에는 고달픈 집배원의 삶이 기록돼 있다. 바지를 무릎까지 걷고 물길을 건너야 했고 가쁜 숨을 몰아쉬며 산길을 걸어야 했기 때문에 자전거는 있었지만 어깨에 매고 다니기 일쑤였고, 배달구역이 9개 리(里)에 걸쳐 있는 것은 물론 편지 한장을 전달하기 위해 산길 6㎞를 걸어야 했다는 애환들이 빼곡하게 담겼다.

당시 강원일보와 인터뷰한 집배원 신씨는 “겨울 눈바람이 심하고 장마때 가장 두려운 길이죠. 이때는 지나는 사람이 저밖에 없어 벙어리가 된 것 같은 착각이 일기도 합니다. 트랜지스터 라디오라도 1대 있었으면 벗이 되겠는데…”라며 아쉬움을 토로하기도 했다. 그날 신씨가 배달한 편지는 평일 기준보다 조금은 적은 800여통이었다고 한다. 이렇게 힘든 일을 하고도 그가 받는 월급은 2만1,000원이었다. 담배(거북선) 한 갑이 300원(종합물가총람·한국물가정보 刊)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상당한 박봉이었다. 기사는 수백통의 우편물을 주인에게 돌려줘 마음이 가볍다는 말과 함께 춘천 시내로 향하기 위해 통통선에 오르는 신씨의 모습을 끝으로 마무리된다.

그때 집배원들은 단순히 편지를 전하는 역할보다는 그것을 받아든 사람들과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는 ‘희로애락의 전령'이었다. 실제 1980년에는 안면도에서 편지 한 장을 전하기 위해 길을 나섰던 집배원이 목숨을 잃는 경우도 있었다. 많지 않은 월급에도 그들이 이처럼 계속해서 소식 전하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던 것은 이 같은 사명감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설날을 앞두고 쏟아지게 될 우편물 속에 마음을 전하는 손편지는, 연하장은 몇 통이나 될는지. 이메일이 득세하고 있는 지금, 아득하게 그 옛날 정겹던 집배원의 모습이 떠오른다.

오석기기자 sgto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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