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

[Week+]강릉사투리와 늦바람 난 老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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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언학의 아버지' 이익섭(75) 서울대 명예교수

①30여 년간 강릉사투리를 연구해 온 이익섭 서울대 명예교수가 강릉시 주문진읍 교항2리에서 노인들과 대화를 나누며 강릉사투리를 채록하고 있다. 강릉=최유진기자 ②이익섭 서울대 명예교수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강릉시 주문진읍 교항2리 최돈숙(96), 이영자(83), 김영기(75)할머니. 이 교수는 할머니들을 진흙 속 숨겨진 보배라고 말한다.

'뺌 가우질' '아이대' '말구버치' 첨 들어보지?

정년퇴직하고 놀고 싶었지만

강릉사투리 방언사전 엉터리

내가 제대로 만들어 보자

1만 단어 발음·성문·예문 정리

음성파일까지 담을 계획

현장 조사가 또 다른 삶의 이유

나를 설레게 하는 삼총사 할머니

3년째 한 달에 한 번 고향行

그녀들은 숨겨진 보석 같아

만날 때마다 단어 1~2개 발견

할머니들 만나 'ㆌ'까지 찾아

고단함 잊고 세상 다 가진 듯

남들은 좀 쉬라고 했다. 노년에 편히 쉬면서 사진이나 찍고 친구들 만나 쉬엄쉬엄 즐기라고 했다.

그러려고 했다. 좋아하는 들꽃 사진이나 찍으며, 그동안 연구했던 방언연구 마무리하면서 쉬려고 했다.

그런데 늦바람이 났다. 그것도 아주 지독한 바람이다. 한 달에 한 번 그녀들을 만나러 고향 강릉으로 간다. 숨겨둔 보석 같은 그녀들을 만나러 가는 길은 매번 설렌다. '이번에는 또 어떤 새로운 말을 들려주려나?'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다.

우리나라 방언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이익섭(75) 서울대 명예교수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장본인은 바로 최돈숙(96), 이영자(83), 김영기(75)할머니다. 이 교수는 할머니들을 삼총사라 칭하며 진흙 속 숨겨진 보배같다고 말한다.

그 중에서도 이 교수를 가장 설레게 하는 이가 최돈숙 할머니다. 이 교수는 “최돈숙 할머니 때문에 다른 데 안가고 3년째 주문진으로 와요. 최 할머니 말씀을 듣다 보면 보석이 꽉 찬 느낌”이라며 “지난번 솔향강릉과 인터뷰할 때 강릉사투리를 보존하기 위해 사투리 기능보유자를 하나씩 선정해야 한다고 말했는데 최 할머니 같은 분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라고 했다.

이 교수와 삼총사 할머니의 인연은 이영자 할머니로부터 시작됐다.

이 교수는 “하루는 모 대학 교수가 강릉사투리 방언사전을 낸다고 축사를 써 달라고 해 읽게 됐는데 읽는 내내 엉터리 같은 어원 분석과 말도 안되는 뜻풀이를 해 놔 화가 났다”며 “그날 이후 내 마지막 연구로 강릉사투리 방언사전을 제대로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했다”고 했다.

그런 결심을 주위에 알렸다. 그중 강릉초교 40회 동창모임에서 한 친구가 “우리 누님이 강릉사투리를 제대로 쓴다”며 소개해 줬고 그렇게 강릉시 주문진읍 교항2리를 찾게 됐다.

“이 할머니를 만나 강릉사투리를 들어보니 제대로 찾아왔구나 싶었는데 최돈숙 할머니를 만나고는 숨은 보배를 만난 듯했다. 그러다 농사지으며 길쌈 얘기를 들려줄 분을 찾다보니 이 마을에서 유일하게 길쌈질을 하는 김영기씨를 만나게 됐다”고 회상했다.

그렇게 삼총사 할머니와 한 달에 한 번 만난다. 만날 때마다 할머니들은 “어휴 이제는 더 들려줄 말도 없어요. 고만 오세요”라고 한다.

하지만 이야기가 시작되면 처음 들어보는(그러나 원래부터 있었던) 강릉사투리가 줄줄이 이어진다. “뭔 야그(이야기)를 하자고 자꾸 오라고 해 아침 일찍 먹고 왔네”(최돈숙)

“아드님은 괜찮아요?”(이익섭)

“지난번에 병원에 가 뺌 가우질(가위질)을 했대”(최돈숙)

“뺌 가우질은 뭐예요?”(이익섭)

“한 뼘 가우질했다고.”(최돈숙)

이야기는 집안 이야기, 자식 이야기, 동네 이야기까지 한도 끝도 없다.

이 교수가 질문을 던지기도 하지만 어떤 이야기는 세 할머니끼리 수다가 이어지기도 한다.

“우리찌리 모여도 좋은기 아이대(말상대)가 돼!”(최돈숙)

“주거니 받거니 지거리는 건데(말하는 건데) 말구버치(말상대)가 돼 하는 건데, 그걸 연구한다고 하니 애가 마르네야.”(이영자)

이 교수는 “이곳 말고도 왕산도 가고 모산도 가는데 주문진은 꼭 오게 된다. 70대, 80대, 90대 등 한 세대를 대표하는 분들이 모두 모여 있고 이 분들의 친정이 사천, 우추리, 금산 이어서 강릉의 다양한 말을 들을 수 있다”며 “그동안 수집한 강릉사투리 단어가 1만 단어가 넘었고 책으로 묶어도 1,000페이지가 넘어 그만하면 됐다 생각해도 오늘처럼 '뺌 가우질' '아이대' '말구버치' 같은 처음 듣는 사투리가 나오고 하니 자꾸 오게된다”고 했다. 그 말이 처음 듣는 사투리인지 어떻게 아느냐고 물으니 “그러니 내가 박사지!” 한다.

하지만 70이 넘은 노교수가 이렇게 현장에 나와 방언조사를 하는 일이 쉽지만은 않다. 이 교수조차 “내가 쓴 방언학 책에도 방언조사는 젊은이들의 일이라고 써 놓고 지금 내 학설을 스스로 깨고 있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일을 하는 이유에 대해 “강릉사투리에 대해 이사람 저 사람 책도 쓰고 많이 했지만 너무 겉으로만 봤다. 강릉말은 정말 깊고도 깊다. 전문가의 시각으로 보니 그런 것이 하나씩 드러나는 건데, 그것들을 (내가) 안 했으면 정말 강릉 천지에 이런 말이 있었던 것도 모르고 이런 깊이가 있었던 것도 모르고 천지에 싹 사라지는 거다”고 했다.

삼총사 할머니를 만나 찾은 단어는 수없이 많다. 그 가운데 이 교수는 “강릉말의 가장 큰 특징중에 'ㆁ+ㆉ'라는 말이 있다. 강릉사투리는 'ㆉ'를 제대로 발음할 줄 아는가 모르는가에 따라 나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삼총사 할머니들을 만나 'ㆌ'까지 찾았다. 모두 고어에서 나온 말인데 '말뤠'라는 단어도 모두 고어'ㆌ'의 흔적”이라고 했다.

가끔 이야기가 멈추면 이 교수가 질문을 던진다. “두다듬이 할 때 도르르도르르 소리가 날 때는 어떤때예요?”(이익섭) “선생님하고 나하고 다듬이 한다면 둘이 맞아야 해요. 맞아야 도르르도르르 하고 안 맞으면 뚜다닥뚜다닥 해요.”(김영기)

삼총사 할머니들에게 “한 달에 한번 교수님 만나 말씀 나누는 것 힘들지 않으세요?” 물으니 “좋지, 뭐 그냥 앉아서 얘기만 하는데..얘기할거 없다고 오지 말라고 해도 굳이 와서 한마디만 하면 공책에 적고 그러니 좋아. 감기 걸려 아파도 약 먹고 와 앉아 있잖나”(최돈춘)

감기걸려 아파도, 아무리 바빠도 다들 모이는 이유에 대해 “우리는 늘 지거리는 건데 뭐 하나 새로 발견하면 그렇게 좋아해요. 그럼 덩달아 우리도 좋아요”한다.

이 교수도 “한 달에 한 번 3~4시간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꼭 새로운 단어 1~2개를 발견하는데 그러면 고단함도 잊고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이 행복하다”고 말한다.

그렇게 3년을 왕래하다 보니 동네 누가 사는지 어머니가 누군지, 택호까지 줄줄이 꿴다. “사과나무댁도 알고 댕금집도 알고 모솔집도 알고...웅굴집도 알고.. 키다리도 알고 뚱뚱이도 알고 쪼꼬뱅이도 알고”(이익섭)

금용골 마을의 택호까지 내리꿰는 3년 내공이 만만찮다.

젊은이들이 해도 고단하다는 방언조사를 왜 하게 됐을까? 이유는 간단했다. 이 교수는 “젊은 패들은 방언조사를 나오면 사투리를 들어도 뭔 소린지 모르니 자꾸 헤매고 대답하는 사람도 자꾸 엉뚱한 소리를 하니 답답하고 그러다 보니 젊은 사람들은 고생스러워한다”며 “당시 시대 상황을 모르고 사투리를 모르니 무슨 말을 어떻게 물어야 할지도 모르고 강릉사투리는 발음, 높낮이가 강릉말의 깊이의 하나인데 40대 이하는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모른다”고 했다.

이교수는 그동안 수집한 사투리를 아이패드에 담아 정리했다. 사전 형식으로 구성된 강릉사투리 사전에는 1만단어가 발음과 성조, 예문까지 세세하게 표현돼 있다. 음성파일까지 담을 계획이라니 이 교수가 펴낼 강릉사투리 사전의 방대함에 입이 절로 벌어졌다.

이런 방대한 조사를 벌이고도 주문진을 찾는 이유는 혹시나 놓쳤을지도 모르는 또 다른 사투리가 없는지 찾아보고 또 찾아보기 위함이다.

이 교수는 이곳에서 방언조사를 하면서 농사를 짓고 고기를 잡던 남성들의 언어 외에 집에서 살림하고 자식을 키우던 여성들의 언어를 찾았다. 바로 내 어머니의 언어였다.

“예를 들어 예전에 고향집에서 다듬이를 둘이 하는 걸 봤는데 그것에 대해 물을 것이 없을까? 하고 운을 떼면 여기는 바로 그건 두다듬이, 외다듬이, 진다듬이, 마른다듬이, 손다듬이, 발다듬이까지 미처 몰랐던 수 많은 단어가 쏟아진다.”

이 말에 최 할머니는 “우리 며느리들도 진다듬이가 뭔지 몰라요. 두루마기 꿰서 손다듬이하는 것도 모르고”라며 거든다. 정말 이 교수와 삼총사 할머니는 아이대(말상대)가 되니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강릉사투리 수다 삼매경에 빠지는 듯하다.

이 교수는 “아메리칸 인디언의 격언 중에 이런 말이 있다. '노인이 하나 죽으면 도서관이 하나 없어지는 것이다.' 도서관이 없어지는 것은 그 도서관에 있는 기록도 모두 사라지는 것이다”며 “이분들이 가진 강릉사투리의 기록이 사라지기전 뉘엿뉘엿 지고있는 마지막 노을을 잡는 절박한 심정으로 강릉사투리를 수집하고 있다”고 했다.

정년퇴직을 하고 마지막 노년을 즐겁게 놀면서 살고 싶었다. 그런 노교수의 발길을 다시 현장으로 돌리고 세월조차 잊게 만든 강릉사투리 연구는 이익섭 교수의 건강비결이자 또 다른 삶의 이유가 됐다.

강릉=조상원기자 jsw0724@kwnews.co.kr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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