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일반

[인생2막, 새 삶을 산다]철학 교수의 전원 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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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필배 박사. 그는 왜 전도유망한 철학자에서 펜션지기가 됐나

전원생활의 꿈을 가진 박필배씨는 2001년부터 2년간 집터를 구하기 위해 원주와 평창 곳곳을 다니다 금당산의 경관에 반해 평창군 용평면 재산리에 터를 잡았다. 펜션을 운영하면서 농사와 대학강의까지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평창=오윤석기자

다람쥐 쳇바퀴 도는 빡빡한 도시생활 싫증나

독일 유학시절 경험한 아름다운 전원 그리워

평창 금당계곡 한눈에 반해 펜션 짓고 정착

콩 심고 산나물 뜯으며 자연 마음껏 즐겨

전공 살려 주민 삶의 의식 높이는 강좌 계획

평창군 용평면 재산2리 해발 650m, 금당산(1,173m) 자락에 위치한 박필배(53) 박사의 집으로 가는 길은 무척 가팔랐다. 도로는 콘크리트로 말끔하게 포장돼 있으나 경사가 심한데다 눈까지 쌓여 있어 마을 초입에 차를 세워놓고 동행한 사진기자와 걸어 올라가는데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그렇게 200여m를 걸어가니 박 박사가 금당산을 등지고 서 있었다.

■철학자에서 시골 펜션 주인으로 변신

그는 성균관대에서 독어독문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 철학과에서 서양철학으로 석사 학위를 받은 뒤 독일 쾰른대에서 칸트 윤리학과 형이상학에 관한 주제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0년간의 독일 유학생활을 마치고 2001년 귀국해 대학강단에 서 모교인 성균관대와 서울사이버대 등에서 교양철학과 윤리학, 형이상학, 칸트철학 등을 강의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전임교수가 되기 위한 치열한 과정 등이 성격상 잘 적응되지 않았고 다람쥐 쳇바퀴 도는 듯한 빡빡한 도시생활이 이어지자 독일에서 경험한, 도시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만날 수 있는 아름다운 전원이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암으로 투병 중이던 부친이 별세하자 도시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은 더욱 간절해졌다.

원래 산을 좋아한 탓에 산 근처에 살고 싶었다. 2003년부터 서울에서 가까운 곳을 찾아 원주의 치악산 주변과 횡성 둔내 일대까지 구석구석 돌아다닌 끝에 한눈에 반한 평창의 금당계곡까지 들어오게 됐다. 친구와 함께 1만2,230㎡(3,700평)의 땅을 매입해 자신이 살 집과 5동의 원룸형 펜션을 지었다. 부인을 설득하는데는 1년 가까이 걸렸으나 독일에서 태어난 중3 아들과 초교 3년 딸은 흔쾌히 아버지의 뜻을 따랐다. 그렇게 경기도 산본에서의 삶을 정리하고 2006년부터 평창에서의 삶이 시작됐다.

집 앞의 밭 3,300㎡(1,000평)에 콩 심고, 고추 심고, 취나물 등 산나물을 재배하며 인터넷 카페를 통해 펜션 '가족나들이 펜션·농원'을 홍보하고 있다. 지인들이나 한 번 다녀간 고객들의 소개로 찾아오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펜션은 거실 전면에 통유리를 설치해 방 안에서 수려한 자연과 황홀한 석양을 볼 수 있도록 설계했다. 여느 펜션과는 달리 인위적인 체험보다 시간을 내려놓고 자연을 맘껏 즐기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펜션 이용객들에겐 텃밭의 고추나 깻잎을 원하는대로 직접 따 먹게 하고 있다. 자신이 따서 나눠줄 수도 있지만 도시민들이 수확의 기쁨을 직접 맛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이 같은 방식으로 운영하고 있다. 옥수수는 주문을 미리 받은 뒤 수확해 택배로 부쳐주기도 한다. 션은 나무로 난방을 하기 때문에 겨울이 시작되기 전 미리 장작을 패 놓아야 한다. 자신이 생산하는 친환경 농산물을 연중 공급하는 시스템을 갖추고 현재 10명의 회원들을 모집했다.

산을 좋아하는 것 이상으로 축구도 좋아해 평창으로 오자마자 용평조기축구회에 가입, 운동을 시작했는데 2년만에 회장으로 추대될 정도로 친화력 또한 뛰어나다. 축구 덕분에 리더십이 알려진 탓인지 마을에 온 지 5년 만에 이장이 돼 전임자의 남은 임기 1년을 채우고 지난해까지 2년을 더 일했다. 그는 “현재 마을 전체 40가구 중 12가구가 펜션을 운영하고 있고 별장 형태의 주택이 10가구, 농사를 짓는 5~6가구와 노인들만 사는 나머지 가구 등이 있는데 마을의 융화가 가장 시급하다”고 했다. 더욱이 마을이 금당계곡을 따라 5㎞ 구간에 산재해 있어 특별한 계기가 없으면 마을 사람끼리도 서로 얼굴을 보기 어려운 상황이다. 그는 10년에 가까운 재산리 마을에서의 생활을 통해 '외지에서의 경력'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가장 겸손하게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가장 아래 단계부터 지역주민들을 진심으로 받든다고 생각해야 서로 소통이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문화적·정신적 소양과 삶의 질 높이는 강좌 계획

그는 학기 중에는 버스를 타고 서울로 가 이틀간 강의를 하고 돌아와 펜션 일을 하며 농작물도 돌보고 공부를 하는 등 세 가지 일을 병행하고 있다. 도시에서 학원강사를 하던 그의 부인은 농촌관광대학을 졸업한 뒤 동문회 총무를 맡고 문화관광해설사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으며 아들은 지역의 고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진학, 군대를 다녀와 복학했고 딸은 올 봄 고교 3학년에 진학한다.

그의 이력을 알게 된 지역의 여러 곳에서 강의를 요청하면 기꺼이 응하고 있다. 앞으로 전공을 살려 지역 주민들의 문화적·정신적 소양과 삶의 의식을 높일 수 있는 강좌를 계획하고 있으며 함께 공부할 수 있는 공간도 마련하고 싶다. 또 마을 주민들의 의견을 모으고 힘을 합쳐 지역에서 생산되는 다양한 농산물을 도시민들에게 정기적으로 공급하는 방안을 마련, 마을 자원으로 확대해 나갈 계획이다. 최근 학자로서 그의 주요 관심사는 환경과 생명에 관한 인간의 규범 문제와 인간의 실천적 가치에 관한 주제들이다. 지난해 '윤리학과 인간의 직업적 삶(도서출판 중원문화)'을 출간했으며 올해 말 '최고선(善)과 칸트철학'을 출간할 예정이다.

평창=정익기기자 igjung@kw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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