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일반

[인생2막, 새 삶을 산다]명문대 법대 출신 증권맨 그 화려한 삶 버리고 한의학에 빠지다

원주 귀래면 운계리 이현주한의원장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던 이현주 한의사는 수많은 사람, 자동차 매연, 빌딩 등 모두가 맞지 않았다. 그러던 중 큰딸을 원주에서 낳으면서 서울을 벗어날 생각에 증권사 생활을 접고 한의학 공부를 시작했다. 원주=오윤석기자

큰딸 낳고 뒤늦게 한의대 입학

어려서부터 좋았던 한의학 공부

환자들 제대로 진료하고 싶어

침 환자 안 받고 약도 직접 달여

귀래지역 한약재 재배 좋은 조건

뜻 맞는 이들과 최고의 약재 키워

환자들에게 좋은 약 주는 게 꿈

“의사·환자 사이 가장 중요한 것

귀한 믿음이라는 가치 전하고파”

부모는 똑똑한 아들이 사법고시를 통과해 법조인이 되길 바랐다. 시골에서 자랐지만 늘 공부 잘하는 아들이었다. 면사무소 공무원으로 평생을 바친 부친은 고시에 붙어 법복을 입은 자랑스러운 아들이기를 원했다. 시골에서 초·중·고교를 졸업했지만 대학은 서울의 명문사립대 법대에 진학했다. 부모는 아들이 그렇게 법조인의 길을 걷는 줄 알았다. 아들은 어려서부터 풀과 나무, 뿌리, 산에서 자라는 야생화를 유난히 좋아했다. 인문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수순처럼 법대에 진학했지만 이공계에 관심이 많았다. 대학을 진학할 때도 3지망이 생물학과였을 정도다. 대학까지는 부모의 뜻에 따랐다. 대한민국에서 알아주는 법대라 졸업 이후에는 법조인 선배들이 줄줄이 있었고 동기, 후배들도 판검사가 돼 있었다. 그렇지만 아들은 정치나 권력에 흥미를 느끼지 못했고 성향도 그쪽과는 무관했다. 결국 고시를 접고 서울의 대기업 증권회사에 몸을 담았다. 화려할 것 같았던 증권맨의 생활이 시작됐다.

■서울 생활을 접다=이현주(49) 이현주한의원장은 서울 생활이 영 맞지 않았다. 꽉 짜인 틀과 표정없이 거리에 가득 찬 수많은 사람, 자동차 매연, 빌딩들 모두 맞지 않았다. 그러던 중 큰딸을 원주에서 낳으면서 서울 생활을 접기로 결정했다.

“애 아빠가 됐다고 생각하니까 서울 생활의 앞날이 안 보였어요. 경쟁, 그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아이를 키울 자신이 솔직히 없었던 거죠. 경쟁을 하면 패자가 생기고 내가 승자가 됐다고 해서 반드시 행복한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증권사 생활을 접고 어린 시절부터 익숙하고 좋았던 한의학 공부를 시작한 겁니다.”

1997년 결혼 3년차. 직장을 그만두고 공부할 수 있었던 것은 그에게 든든한 후원자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바로 아내. 아내는 회사를 그만둔 남편의 후원자 역할을 자처했다. 남편이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도록 뒷바라지할 각오도 돼 있었다. 직장으로 다니던 연구소 생활이 쉬운 것은 아니지만 확실한 꿈이 있는 남편을 믿었다. 그 길을 가라고 등을 떠밀다시피 적극적이었다. 이 원장은 97학번으로 한의대에 입학했다.

■동의보감(東醫寶鑑)에 빠지다=대한민국 사람들은 한의대에 가면 당연히 학생들이 동의보감을 공부하는 줄 알고있다. 이 원장도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대학에서는 동의보감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 오히려 약초꾼들이 동의보감을 팔아먹고 있었다. 본초강목 등은 인용을 안 해도 동의보감에 대해서는 꽤나 아는 척을 하곤 했다. 동의보감을 기본이라고 생각하면서 아무도 동의보감 공부를 하지 않는 것이었다. 원전의 동의보감을 공부하기 위해서는 한자가 필수였기에 모두 엄두를 못 냈기 때문이다.

“막상 한의대에 들어가니까 한문공부를 안 하더라고요. 한문공부가 안 돼 있으니까 동의보감에 접근하기가 어려웠던 겁니다. 우리가 학교 다닐 때만 해도 국한문 혼용으로 국어를 배웠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저는 법대를 다니면서 한자를 상용적으로 사용하다 보니 한자가 친숙한 것도 큰 도움이 됐어요. 여기에 좋은 서당에서 좋은 훈장님을 만난 것도 큰 행운이었지요. 2년6개월 정도 한문공부를 엄청나게 했습니다. 동의보감 원전을 혼자서 읽을 수 있을 정도로요. 동의보감은 사용한 문자가 한자라 그렇지 한글이나 현대어로 돼 있었다면 고등학교 졸업의 학력만 있으면 누구나 읽을 수 있을 정도로 쉽습니다. 동의보감이 대단한 것은 종합의서(醫書)라는 점입니다. 이런 의서는 세계 어디에도 없습니다. 물론 동의보감이라고 해서 모두 맞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잘못된 점도 분명히 있지요. 그 오류를 바로잡아 원문과 함께 번역서를 만들어보고 싶은 것이 소망입니다. 아직까지 많이 부족해 시작은 했지만 마무리가 안 되고 있어요.”

■귀한 사람들의 고장 '귀래(貴來)'에 둥지를 틀다=한의대를 졸업한 이 원장은 고향인 횡성에서 2003년 한의원을 개업했다. 최대한 국산 약재를 사용하기 위해 애썼다. 횡성읍내에서 곧잘 운영되던 한의원을 접고 2011년 귀래에 둥지를 튼 것은 한의원을 찾는 환자들과 좀 더 오랜 시간을 갖고 싶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덧붙이자면 이현주한의원을 찾는 사람들은 모두 귀한 사람이고, 이곳에 사는 사람들도 모두 귀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귀래라는 지명이 너무 마음에 든 이유다. 귀래로 들어와서는 침 환자도 받지 않았다. 주위에서는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가족들과 지인들은 시골에서 무슨 한의원이 되겠느냐며 탄식에 가까운 한숨을 내쉴 정도였다. 평화당한의원으로 시작한 횡성에서의 생활은 한의사에 대해 근본적으로 성찰하게 만들었다. 침 환자와 약 환자를 모두 진료한다는 것은 진정한 한의사로 가기 위해서는 힘들다는 생각이 들었다. 귀래에 집터를 잡고, 이층집을 올리고, 웬만한 한의원에서는 꿈조차 꿀 수 없는 한약재 창고도 만들었다. 습기를 제거하는 건조창고를 만들어 한약재 특유의 성분을 지키려고 애쓰고 있다. 국내에서는 기후와 환경 등의 문제로 구할 수 없는 감초와 계피 등 일부만 수입산을 이용하고 있다.

“이제마 선생은 한 사람의 사상체질을 알기 위해 6개월 동안 그 사람과 함께 생활을 할 정도로 철저했다고 합니다. 그렇게까지는 못 해도 나를 찾아온 환자에 대한 병의 근본을 찾기 위해서는 10~20분 상담으로는 안 된다고 봅니다. 병의 원인이 어디 있고 그 원인은 또 무엇으로부터 왔는지 알려면 하루 종일 함께 이야기를 해도 모자라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침 환자를 받지 않고 있습니다. 침도 놔야 하고 진료도 해야 하고 약도 내려야 하는 것은 보통 힘든 일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직접 약을 탕제한다고 하면 사람들이 잘 믿지 않는 경우도 있을 정도니까요.”

■최고의 한약단지에서 최고의 한약을 만들고 싶은 꿈=당귀와 천궁 냄새가 은은하게 감도는 이현주한의원 대기실은 지점토로 만든 사람 인형들이 찾는 이를 반갑게 맞이한다. 엉덩이를 드러내고 침 맞는 할아버지,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시집가는 신부, 즐거운 신랑, 한여름에 소 모는 아이 등등…. 감탄에 감탄을 하는 사이 병도 나을 것만 같은 곳이다. 모두 이 원장 아내의 작품이다.

“귀래지역은 해발고도가 다양해 웬만한 한약재를 모두 재배할 수 있는 최고의 조건을 갖춘 곳입니다. 뜻이 같은 사람들과 함께 이곳에서 국내 최고의 한약재를 재배해 한의원을 찾는 사람들에게 좋은 약을 드리고 싶은 것이 작은 꿈입니다. 아내와 함께 이곳에 들어온 것도 돈벌이가 목적이었다면 들어올 수 없었을 겁니다. 하지만 돈보다 귀한 가치를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었어요. 믿음말입니다. 의사와 환자 사이에 가장 귀한 믿음이라는 가치를 많은 사람에게 전해주고 싶습니다.” 그에게서 당귀와 천궁의 향이 은은하게 흐르고 있었다.

원주=원상호기자 theodoro@kwnews.co.kr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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