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일반

[2013 신춘문예]고양이의 자세로

단편소설 임지현

그림=조남원

5시 반을 가리키는 시계 아래에서 닫힌 줄 알았던 방문의 긴 틈이 보였다

도중에 일어나 더 잘 수 있다니…몸을 뒤집다가 그대로 멈췄다

허리가 아팠다…힘을 빼면 더 아파서 뻣뻣하게 힘을 넣은 채로 누웠다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일주일이 넘게 만나지 못한 것은 오랜만이었다

그냥 보고 싶어서…그녀는 잘 들리지 않는다는 말만을 반복했다

그녀는 문득 해봤어? 하고 물었다 ? 허리에 좋은 동작 고양이 자세

남자는 허리가 더 아플지도 몰라서 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녀는 혀를 찼다 "그런 건 해 봐야 알지…시도라도 해 봐" 전화가 끊겼다

보일러를 틀기 시작한 날이었다. 온도와 가스비가 함께 올라가기 시작한 밤에 남자는 예정보다 빨리 잠에서 깼다. 5시 반을 가리키는 시계 아래에서 닫힌 줄 알았던 방문의 긴 틈이 보였다. 손톱만 한 방에서는 다리만 뻗어도 문을 닫을 수 있었지만 이불 밖으로 다리를 내는 것도 싫어서 관두기로 했다. 영어학원으로 출발하기까지 취침시간이 세 시간이나 더 남아있었다. 도중에 일어나서 더 잘 수 있다니, 선물 같다는 생각을 하며 몸을 뒤집다가 그대로 멈췄다. 허리가 아팠다. 남자는 요즘 열흘 뒤에 있을 하프 마라톤 계주에 참가하게 되어서 평생 움직이지 않던 몸을 놀리고 있었다. 허리가 묵직한 것은 달리기를 하고 난 다음 날이면 으레 있는 일이긴 했다. 어쩌면 어제 조금 더 뛰어서 오늘은 묵직하다 못해 아픈 걸지도. 조금 비틀어봤더니 버튼이 눌린 듯 입에서 비명이 튀어나왔다. 발치에 있는 핸드폰을 잡으려고 두 손으로 몸을 아래로 밀었지만 하체는 꿈쩍도 않고 상체만이 압력을 받아 허리가 수만 개의 통점 위로 밀렸다. 남자에게 견디는 건 비교적 자신 있는 일에 속했으나 그 방도를 차마 떠올릴 새도 없이 신음이 배배꼬여 나왔다. 결국 도움을 요청하기로 했다. 아버지는 주말에만 올라오시니 큰방에 있을 법한 사람은 어머니뿐이었다. 몇 번 불러보았으나 반응이 없었다. 하긴, 5시 반은 어머니가 새벽기도를 갔을지도 모르는 시간이었다. 사실 회사를 그만둔 이후 지금 시각은 남자에게 언제나 한밤이었다. 큰방과 작은방은 언제나 시간이 달라서 두 사람이 아침을 공유하는 일은 드물었다. 힘을 빼면 더 아파서 뻣뻣하게 힘을 넣은 채로 누웠다. 움직이지 않으면 괜찮았으니 어머니가 올 때까지 조금만 버텨보자고 생각했다.

6시가 조금 넘어 거실의 불이 켜졌다. 틈으로 빛이 새어 들어왔다. 어머니는 새벽바람이 새어들지 못하게 몸을 옷으로 꽁꽁 싸매고 있었다. 허리가 아프다는 남자에게 어머니는 어제 달리고 왔느냐고 물었다. 병원을 가기 전에 어머니는 남자의 방에 널려있는 콜라 캔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처녀 시절에 간호조무사로 일하던 경험을 살려 최근 다시 일을 시작한 그녀는 몸과 음식에 대해 자신이 알고 있고 그것에 깊이 관여하고 있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콜라는 이빨을 삭게 하고 속을 부식시켜. 병원으로 실려 가는 길에 남자는 몇 번이고 비명을 참으려 입술을 깨물었다. 차가 덜컹거리는 순간에, 몸이 조금만 위치를 달리해도 허리가 삐걱거렸다. 앰뷸런스 안의 사람들은 증상이 분명한 환자인 남자보다는 빨리 도착하는 것에 더 관심이 있었다. 들것으로 옮겨갈 무렵에 남자의 입술은 이미 터져있었다.

일어나 앉으실 수 있겠습니까?

자신의 움직임과 통증이 밀접하게 관계를 맺고 있었기에, 남자는 아주 소심해져 있었다. 앉진 못하겠어요. 일어나는 건 더더욱 그렇구요. 의사가 남자를 힐끔 보았다. 진짜로 일어나실 필요는 없어요. 달리기를 한 다음 날은 항상 허리가 조금씩 아파요. 오늘은 좀 더합니다. 혹시 무슨 문제가 있나요? 젊어 보이는 의사는 벌써 표정을 관리하는 법을 익힌 듯 남자의 재촉에도 별다른 동요 없이 차트와 엑스레이를 보고 있었다. 이런 환자도 골백번 이런 말도 골백번. 남자는 자신의 조급한 마음만큼이나 의사가 몹시 얄미웠지만, 남자의 어머니는 반대로 그 차분함이 마음에 들어서 참 괜찮은 청년이네 하고 생각하는 동시에 지방 의과대학의 기숙사에서 자고 있을 자신의 딸을 떠올렸다. 이런 남자와는 어울릴까? 딸은 머리를 위로 틀어 묶은 채 한쪽 팔을 베개 밑에 두고 잠들어 있을 것이다. 어릴 적부터 그 애는 그렇게 잠을 잤다. 언젠가의 아침에 딸이 일어나 팔이 아프다고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아들의 허리 통증은 전혀 뜻밖의 일이었다. 그러고 보니 딸만큼 아들을 그렇게 자세히 본 적이 없었다. 딸과는 달리 신경 써서 본 적은 없지만 이 아이도 잠버릇이 있고, 그것의 문제인 걸까. 어머니는 생각했다. 어느새 일곱 시가 된 침대 곁에서 한참 동안 뼈의 그림이 그려진 검은 사진을 보던 의사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림엔 아무것도 없는데요.

아무것도?

네 아무것도.

그럼 심각할 수도 있는 거네요.

심각한지도 알 수 없죠. 아직 모르니까.

결국 의사는 스트레스 때문에 일시적으로 초래된 상태일 수도 있으니 일단 좀 더 지켜봅시다, 를 끝으로 다음 방문을 고했다. 약은 일주일 치였다. 집에 가기 전에 일단 하나 먹고 가자는 어머니의 말에, 남자는 그게 무슨 약인지도 모르는 약을 받아 물과 삼켰다. 병원에 올 땐 정황을 파악할 수 없는 응급이라 구급차를 탔으나 집에 갈 때는 그냥 귀가하는 환자가 되어 택시를 타야 했다. 뒷좌석에 혼자 접혀 들어갈 때 남자가 비명을 질렀고 택시기사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작은 공간이 아들의 소리로 울리자 어머니는 조금 창피해했다.

삼 일이 지났고 정체 모를 약은 계속 먹고 있었다. 허리가 좋아지거나 하는 일은 아직 없었다. 날이 더 추워지자 남자의 어머니는 보일러를 틀었고, 남자는 바닥 지열이 잘 안 되는 자신의 방을 떠나 보일러 불이 잘 들어오는 안방 바닥에 전기장판까지 깔고 온종일 누워있게 되었다. 오후 여섯 시. 여느 때 같았으면 편의점에서 파란 유니폼을 걸치고 사장이 놀러 나가는 것을 배웅했을 시간이었다. 병원을 다녀와서 남자가 전화했을 때 사장은 받자마자 어디냐고 물었다. 교대시간이 되기 한참 전이었다. 언제나처럼 자신이 작은 상자 같은 카운터에 갇혔다고 생각하며 남자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저 허리에 문제가 생겨서요. 사고야? 사고는 아닌데… 그냥 허리가 좀 아파요. 병명은? 그것도 지금은 몰라요. 음… 알았어. 죄송해요. 아냐. 너 없는 동안은 내가 당분간 오후까지 다 하면 되지. 빨리 나아. 빨리 나아. 빠알리 나아.

모두가 나간 집이 조용했다. 남자는 안방에 누워서 천장만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책을 읽거나 텔레비전을 보는 것보다도 그렇게 계속 천장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왠지 마음이 편했다. 지은 지 오래된 주택의 천장은 구석구석까지 꼼꼼하게 벽지가 발려 있었고 마냥 흰색이라고만 생각했던 종이에는 옅은 색깔의 꽃들이 피어 있었다. 중간에 달린 형광등만 치워버린다면 남자는 광활한 공터에 있는 것 같았다. 공터에는 시곗바늘이 걸어가는 소리와 이따금 싱크대에서 물이 떨어지는 소리만이 들렸다.

손을 머리 위로 뻗으니 물병과 컵이 손에 걸렸다. 예의 약봉지들도 그곳에 있었다. 끓여놓고 간 물 때문에 물병에 온기가 남아있었다. 남자가 길 수는 있었음에도 그의 어머니는 남자의 손이 닿을 수 있는 여러 곳에 여러 생필품을 쟁여놓고 출근을 했다. 옷장에 몸을 기대어 밥을 대충 챙겨 먹은 후 빈 그릇들을 그대로 두고 보고 있자니 또다시 가슴 밑바닥이 부대꼈다. 내가 여기에 이렇게 있어도 되는 걸까 하는, 대학에 들어갔을 무렵부터 익숙한 느낌이었다. 남자는 거실로 기어나가 텔레비전을 켜 둔 채 방으로 돌아와 다시 누웠다. 사람들이 끊임없이 말을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한 남자가 나와서 젤리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는 담배를 끊으려 했고 여느 사람처럼 금단증상에 시달리고 입이 심심하던 차에 젤리가 자신을 구했다고 했다. 남자는 콜라가 생각났다. 무언가 더 필요한 것이 없느냐는 어머니에게 콜라를 마시고 싶다고 했다가 세찬 면박을 당했다. 물을 마시듯 콜라를 들이켜는 남자에게 당분간 주중에 콜라가 올 길은 없어 보였다. 남자는 아버지가 집으로 오는 주말을 노려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남자의 아버지도 콜라를 좋아했다. 둘 다 계속 그렇게 콜라를 마시다가는 뼈가 다 삭아버릴 거야. 남자의 생각을 읽은 듯 어머니가 말했다. 네 아버지는 담배까지 피우니까 속도 다 썩을 거고! 남자는 자기가 담배를 피웠었다는 사실을 어머니가 끝까지 모르게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남자는 문득 허리의 요통이 담배나 콜라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빨도 삭게 만든다는 콜라의 기포가 자신의 허리뼈에 오돌토돌하게 들러붙어 있는 것을 상상하니 조금 끔찍했다. 문득 병원에서 흡연사실도 말했어야 했나 하고 남자는 생각했다.

허리가 욱신거렸다. 만약 어머니의 말이 맞는 것이라면 이 요통은 콜라 때문에 뼈가 삭은 것일 수도, 담배 때문에 속이 썩어버린 것일 수도 있다. 어느 쪽이 더 가까울까. 남자는 궁금했다. 몸속에 자욱하게 퍼진 연기는 폐만이 아니라 허리에도 암이니 종양이니 하는 것들을 주렁주렁 맺히고 썩게 걸까. 그럼 나랑 같이 콜라를 마시고 담배를 피웠던 그 녀석과 그 녀석, 그 녀석들도 다 이런 아픔을 겪게 되는 걸까. 키가 큰 탓인지 어릴 적부터 달리기를 한 후에는 항상 허리가 아팠었는데. 그날 달리기를 어떻게 했었더라. 남자는 아침과 똑같은 자세로 이불에 누워 꼼짝없이 천장을 바라보았다. 직사각형의 흰 천장에는 여기저기 누렇게 얼룩이 져 있었다. 작다고만 생각했던 방이 몹시 넓어 보였다. 이불에 박혀 올려다본 천장은 끝이 없었다.

이게 허리에 좋대.

그녀가 책과 한 뭉치 페이퍼들을 꺼냈다. 이건 영어학원 페이퍼. 다음 주에 퀴즈 봐. 시계는 열한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둘이 함께 다니는 토익 학원으로 그녀가 혼자 출발하기 전까진 아직 한 시간의 여유가 있었다. 남자가 빠진 며칠간 수업과 스터디에서 나온 자료가 한 뭉치나 되었다. 자료 뭉치를 남자의 머리맡에 놓아두고 그녀가 책을 집어 페이지를 접어 표시한 부분을 펼쳐 남자에게 건네주었다. 책에는 대학 도서관의 바코드가 붙어 있었고 많이 손을 탄 듯 닳아 있었다. 책에는 몸에 딱 붙는 분홍색 운동복을 입은 저자가 엉덩이를 양껏 뒤로 뺀 채 허공으로 얼굴을 치켜들고 있었다. 마치 네발짐승이 하늘을 향해 포효하는 그림 같았다. 허리가 아파진 이후로 집 안에서는 내내 저러고 다녔지만 별 소용없었는데. 그 상태로 좀 버티는 게 중요하지. 그때의 아픔이 느껴지는 것 같아 왠지 허리에 힘이 들어갔다.

움직이지도 못하는데 이걸 하라고?

그래도 해봐.

제법 완강하게 주장하는 그녀의 기세에 밀려 남자는 조금씩 몸을 밀어서 뒤집었다. 아치, 아치란 말이지. 언젠가 보았던 고양이의 털이 곤두선 모습을 상상했다. 하나, 둘, 커헉. 그녀는 그 모습이 웃겼는지 깔깔 웃고는 화장실을 간다며 방을 나갔다. 버티지 못하고 바닥으로 허물어진 남자의 주위에는 약봉지가 널브러져 있었다. 남자는 자신의 휴대폰으로 고양이 자세를 검색해 보았다. 책과 같은 자세로 모델들이 자세를 취하고 있었고 요통과 소화에 좋다고 글씨가 볼드체 처리까지 되어 나와 있었다. 남자는 욱신거리는 허리를 잡고 한숨을 쉬었다. 약과 함께 먹으라고 어머니가 끓여 놓고 간 물은 이미 식은 지 오래였다. 대체 무슨 소용이 있는지 모르겠는 것들 사이에 남자가 누워있었다.

방으로 돌아온 그녀는 아르바이트를 쉬고 학원도 다음 주까지도 어떻게 될 줄 모르겠다는 남자의 말에 피해가 막심하네, 하고 중얼거렸다. 집에서 안 나가니까 돈을 안 쓰고 있다는 것은 좋았으나 이미 낸 학원비를 허투루 날리고 있다는 것에 대해선 남자도 조금 속이 상했다. 그녀는 별로 나아지는 것 같지는 않더라도 약은 꼭 챙겨 먹으라고 당부했다. 그리고 어차피 쉬게 된 거니까 알뜰하게 잘 쉬고 힘을 축적해서 다시 현업에 복귀하라는 말까지 잊지 않았다. 또박또박 말하는 그녀의 가방 안에는 어느 아나운서의 자서전이 들어있었다. 남자는 그녀의 말이니 맞을 것이라 생각했다. 정보에 빠르고 똑똑한 그녀는 학원에 다니고 나서부터 토익점수가 날로 상승했다. 같이 있는 중에도 그녀의 핸드폰이 몇 번이나 울렸다. 언론 고시를 준비하는 스터디 사람들이라고 했다. 함께 언론고시를 준비하는 사람들보다 나이가 좀 많은 그녀는 같이 준비를 하는 동생들이 종종, 시험에 탈락한 후에 얼마나 탈락해야 면역이 될까, 같은 것들을 물어온다고 웃었다. 그녀는 언제나 진취적이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알았기에 남자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그녀에게 많이 질문을 하는 것 같았다. 사실은 나도 잘 모르는데 하고 그녀가 남자를 보았다. 언제 면역이 될까? 남자는 거기에 대해 별로 할 말이 없어서 자기도 궁금하니 알게 되면 말해달라고 했고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누워있는 남자의 곁에서 과제를 하는 그녀의 필통 안에 기다란 통이 하나 보였다. 예전에 그것을 궁금해하는 남자에게 그녀는 발포 비타민이라고 이야기해 주었다. 하나 먹어보라고 건네준 동그란 것을 무턱대고 입에 넣었다가 거품이 입 밖까지 흘러나와 당황했던 기억이 있었다. 그녀는 깔깔 웃더니 하나를 꺼내 카운터 직원이 건네준 생수에 퐁당 빠뜨렸다. 둥글었던 형태가 풀어지면서 끝까지 끈질기게 기포로 화해버리고 물이 노란빛으로 물들었다. 여태 비타민이라고는 이빨로 씹어 먹는 것밖에 맛보지 못한 남자는 자신의 여동생도 그렇고 그녀들이 기본적으로 남자보다 똑똑한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3살 차이인 남자의 여동생이 남자에게 공부를 뒤지던 것은 초등학교 때뿐이었고 남자가 어물쩍 점수를 맞춰 대학을 간 것에 비해 여동생은 재수까지 해서 의대를 들어갔다. 그 자신은 재수를 별로 자랑스러워하는 것 같지 않고 오히려 처음 겪어본 첫 고배에 대해 부끄러워하는 기색이 더했지만, 의대를 가는 사람 중에 재수는 양반이라며 부모님은 기뻐했다. 뒤에서 지켜보던 남자의 마음에도 그 일은 큰 감명을 주었다. 남들이 별 이유 없이 다 가고 싶어하는 의대라 해도 재수까지 해서 들어간 것이라면 그래도 뭔가 마음의 확신이 있었을 거라는 생각에 처음으로 여동생이 대단해 보였다. 하지만 사실 여동생한테 이것을 직접 물어본 적은 없었다.

그녀가 가고 나서 남자는 전기장판의 눈금을 조금 더 올리고 눈을 감았다. 집에 누워있으니 끝도 없이 잠이 왔다. 하루에 몇 번씩이나 잠들었다 깼다를 반복하는 것이 조금 부끄럽게 느껴졌지만 그녀의 말대로 잘 쉬어야 낫는다는 일념으로. 나아야 제 몫을 한다는 일념으로 의무 같은 죄책감을 이겨보기로 했다. 핸드폰에 사장에게서 문자가 와 있었다. 아픈 건 좀 괜찮아? 남자는 사장이 정말로 궁금해서 묻는 것이라기보다는 빨리 자신이 나타나 교대해 주기를 바라는 것이라 생각했다. 놀기를 좋아하는 사장의 성격으로 봐선 오후에 가게 문을 닫고서라도 자신이 놀 곳을 찾아 떠나겠지만 일주일 내내 그럴 수는 없을 것이다. 사장이 바라는 답은 내일부터 다시 교대자가 생기는 것이고 이미 삼 일이 지난 지금 남자가 마땅히 해야 할 답도 그것이었으나 아직 남자의 허리가 합당한 결석사유의 역할을 잘 하고 있었고 적어도 다시 병원에 다녀올 때까지 사 일간의 여유기간이 더 확보되어 있었다. 그때까지는 허락했으니 잘릴 염려도 없었다. 남자는 대신 수고해주셔서 감사하다고 답신을 보내고 핸드폰을 던져두었다. 이제 어머니가 밤에 퇴근하고 돌아올 때까지 또 혼자였다. 약 먹는 걸 관두려다가 그녀의 말이 떠올라서 봉지를 뜯었다. 색깔이 다른 알약들이 물을 타고 남자에게로 흘러들어갔다.

지난번의 그 의사는 두 번째 만나는 것임에도 여전히 별 표정이 없이 무뚝뚝했다. 조금 기어 다닐 수는 있지만 약이 별 효과가 없는 것 같다는 소리에 그는 그런가요-하고 짧게 대답하더니 인터폰으로 누군가에게 연결했다. 의사는 수화기 너머의 대상과 짧게 대화를 하더니 남자에게 피부과로 가보라고 했다. 웬 피부과냐고 되묻는 남자의 어머니에게 의사는 피부과 담당 의사가 소견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며 한 번 증세를 보고 싶어한다고 했다.

간호사가 휠체어를 끌고 들어왔다. 남자는 이 상황이 맞는 것인지 헷갈렸지만 의사의 말을 따라 부축을 받아 휠체어에 앉았다. 의사는 벌써 다음 차트에 시선을 꽂고 있었다. 저기요. 네. 고양이 자세는 제 허리에도 좋나요? 의사가 무슨 말을 하는 거냐는 눈빛으로 남자를 보았다. 휠체어는 남자를 황급히 진료실 바깥으로 실어 날랐다. 피부과는 아래층에 있었다. 에스컬레이터로는 내려갈 수가 없어서 엘리베이터까지 돌아가야 한다며 간호사는 휠체어의 손잡이를 남자의 어머니에게 넘기고는 먼저 1층으로 내려가버렸다.

피부과 의사는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었다. 그의 진료실은 흰색 가구들로 채워져 있었고 오직 몇 권의 책들만이 선명한 색을 가지고 있었다. 환자가 진료실에 들어왔음에도 의사는 키보드로 열심히 자판을 치고 있었다. 의사는 타자에 익숙지 않은 듯 한 손가락씩만을 이용해 자판을 입력했다.

언제부터 아팠나요?

네?

언제부터 허리가 아팠나요.

아 일주일 전부터요.

왜 그렇게 됐나요.

달리기를 하긴 했는데?. 글쎄요. 지금은 잘 모르겠어요.

의사가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눈동자가 왠지 초롱초롱해서 남자는 비밀을 들킨 느낌에 조금 주눅이 들었다.

달리기는 왜 했나요?

체력을 기르는 데 좋다고 아버지가 추천해 주셨어요.

정확히는 체력과 지구력을 기르는 데 좋을 것이라고 했었다. 남자가 1년 만에 회사에 사표를 쓰고 돌아왔을 때 아버지가 한 말이었다. 그때 아버지는 남자에게 흰 운동화도 사주었다. 남자 스스로는 그때 회사를 그만둔 것은 잘한 일이었다고 생각했지만 한 회사에서 생애의 반을 보낸 아버지는 생각이 달랐다. 의사는 뒤에 있던 책꽂이에서 두꺼운 원서를 꺼내서 펼쳤다. 책의 겉면에는 'Dermatology'라고 적혀있었다. 의사는 남자를 진료대에 눕히고 허리를 보았다. 잠시 여러 곳을 눌러보며 아픈지 묻던 남자는 책을 뒤적이더니 포스트잇을 꺼내 볼펜으로 글씨를 꾹꾹 눌러써서 내밀었다. 발음하기조차 어려운 병명이 한국어와 영어,두 가지 언어로 적혀 있었다. 이게 뭐야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의사는 역시 들을 생각이 없는 것 같아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또 하나의 '아마'를 설명하기 위해 그가 길고 주름진 손가락으로 책의 어느 부분을 짚었다. 사진 한 장 없이 영어로만 빽빽이 채워져 있었다.

아마 이 병일 수도 있을 겁니다. 심한 것은 아니니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하지만 여긴 피부과니까 이건 피부 쪽 병이 아닌가요? 전 허리가 아픈데요.

어디가 아프다고 해서 반드시 거기가 원인일 거라곤 장담할 수 없죠.

하지만 이 병인 건 아마 맞을 겁니다- 라고 의사가 말했다. 무엇이든 맞을 가능성이 있고 무엇이든 틀릴 가능성이 있어요. 확신하는 건 위험합니다. 의사의 앞에 펼쳐진 책은 남자의 집에 쌓인 토익학원의 유인물들을 책으로 엮어놓은 것만 같았다. 남자와 어머니가 전문용어로 가득 찬 원서를 알아볼 여지는 거의 없었다. 그녀가 가져다준, 아직 손도 대지 않은 그 종이들을 다 보면 저 손가락이 가리키는 글들에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할 수 있을까 생각했지만 왠지 길이 멀어 보였다. 남자의 의심 어린 얼굴이 걸렸는지 의사가 덧붙였다. 사실, 우연히 식사를 하다 들어보니 이게 제가 겪었던 증상과 비슷한 것 같아서 말이죠. 아마 비슷할 겁니다. 남자는 병원 내의 식당에서 그 무뚝뚝한 얼굴로 자신의 증상을 다른 의사들에게 말하는 아까의 젊은 의사를 생각했다. 읽을 수도 없는 원서보다 의사가 겪어보았다는 말에 어머니의 표정이 조금 밝아졌다. 의사는 주사를 한 대 맞고 가라고 했고 남자는 주사실로 옮겨졌다. 팔에 맞으면 안 되느냐고 했지만 피곤한 기색이 만연한 간호사는 어서 바지를 내리라고 했다. 무슨 주사예요 하고 물으니 영양제예요 라는 짧은 대답과 함께 간호사의 손이 남자의 엉덩이를 쳤다. 톡 하고 뚫린 작은 틈으로 투명하고 끈적끈적한 액체가 밀려들어 갔다. 어디에 좋은 영양제인가요. 간호사가 말했다. 영양제는 몸에 좋아요.

병원을 다녀오고 며칠이 더 지나갔지만 남자의 허리는 나을 기미도 없이 매일 같은 수준의 고통을 수반했다. 차라리 더 나빠지기라도 하면 변화라도 감지하여 경과라도 볼 수 있었겠지만 그런 것도 없는 나날에서 남자가 아침마다 품는 작은 희망은 혹시나 하며 몸을 움직일 때마다 무참히 깨졌다. 그녀는 그 뒤로 한 번 더 와서 저번과 비슷한 양의 종이 뭉치를 전해주고 갔다. 하지만 남자가 그것을 보는 일은 없었다. 어머니는 하루하루 걱정이 늘어갔지만 사실 남자에게는 지금 허리가 아파서 누워있는 상황이나 그렇지 않았을 때나 별로 다른 점이 없었다. 그때도 지금도 남자는 똑같이 멈춰있었고 똑같이 밖을 달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사람들이 무언가 다른 상태로 변하기 위해 무언가를 하는 것이라면 무엇을 해도 변하지 않는 생활에 남자는 익숙해져 있었다. 꼭 변해야 하는 걸까. 변하지 않는 건 틀린 것일까. 남자는 헷갈리기 때문에 하라는 대로 했지만 무엇이 답인지는 내내 알 수 없었다. 아버지는 주말에 올라와서 남자를 보고는 계속 이렇게 있을 수는 없으니 큰 병원으로 가서 진찰을 받아보라고 했다. 남자는 진찰을 받은 병원이 10층까지 있는 큰 병원이었다는 것을 굳이 말하지 않았다. 안방을 차지하고 누워있는 남자 때문에 아버지는 남자의 방으로 이불을 가져가서 잤다. 남자는 안방에 누워있는 동안 자주 만약 자신이 이대로 영영 낫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지 생각했다. 두 발이 사라져 버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인터넷으로 허리 전문 병원을 찾아서 전화를 걸었다. 서울 시내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병원은 이미 일주일 치의 예약이 꽉 차 있어서 다음 주나 되어야 검진을 받을 수 있다고 했다. 혹시 기존에 다니던 병원이 있다면 검사기록을 팩스로 수신받아 참고할 수 있습니다만. 없다면 검사들부터 받으셔야 합니다. 조금 생각하다가 없다고 대답했다. 전의 병원에서는 아무 일도 없이 깨끗한 엑스레이 사진과 피부과에서 받은 자연스럽게 회복될 것이라는 처방전만 있을 뿐이었다. 결국 다시 일주일 뒤로 시간을 넘기고 말았다. 편의점 사장에게는 어떻게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핸드폰 화면 한 귀퉁이에 오래 실행시키지 못한 프로그램이 보였다. 달리기 시간을 재서 자동으로 사진첩과 SNS에 공지처럼 올려주고 저장해주는 프로그램이었다. SNS를 열어보니 타임라인에 오늘을 달린 사람들의 기록이 사진이 되어 올라와 있었다. 요즘은 따로 이야기는 하지 않아도 스스로 달리는 사람들이 많이 보였다. 핸드폰 사진첩에 저장된 남자의 기록은 일주일 전에서 멈춰 있었다. 아버지가 여전히 하얀 자신의 운동화를 보던 것이 생각났다. 하프 마라톤 경주까지 삼 일이 남아 있었다.

그날 밤 거실 건너편 자신의 방에서 아버지가 기침 하는 소리를 들으며 남자는 꿈을 꾸었다. 꿈에서 남자는 지갑과 열쇠를 챙긴 후에 아버지의 파카를 걸쳐 입었다. 주머니에는 돈 삼천 원과 라이터가 있었다. 남자는 네발로 기어서 밖으로 나갔다. 허리는 생각보다 별로 아프지 않은 것 같았다. 하지만 네발로 걷는 남자로서는 일어서서 현관문을 잠글 수 없어서 그냥 문을 닫아두기만 한 채 그냥 계단을 내려갔다. 남자의 손바닥에 까끌까끌한 돌들의 자국이 찍혔다. 몇 개의 가래침과 쓰레기봉투, 하수구 구멍과 담배꽁초들을 지나 편의점에 도착한 남자는 카운터로 갔다. 앳되어 보이는 그녀 아르바이트생은 수염이 덥수룩하고 새카만 인간, 그것도 남자가 네발로 문을 열고 기어오자 겁이 나는 듯 핸드폰을 손에 꼭 쥐고 있었다. 던힐 한 갑 주세요.

남자가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위로 건네자 아르바이트생은 주춤거리며 돈을 받아 계산기에 집어넣었다. 밖에 마련된 파라솔의 플라스틱 의자에 몸을 깊게 기대서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숨을 깊게 빨아 당기니 풍성한 연기가 함께 따라나와 입에서 퍼졌다. 오랜만에 피우는 것이라 그런지 연기가 목구멍으로 넘어가다 막혀 콜록거렸다. 군복을 입은 한 사람이 앞자리에 와서 앉았다. 그는 남자의 군대 선임이었다. 남자가 일병을 달아 운전병으로 배치되었을 때 그는 이미 병장이었다. 성격도 무난하고 착실하게 자기 할 일을 하던, 남들이 후임에게 텃세부리는 것을 우스워 못 봐주겠다고 말하던 그는 보기 드물게 좋은 선임이었다. 그가 지방에 사는 바람에 전역을 한 후로는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고 남자 쪽에서도 먼저 연락할 일은 없어서 자연스럽게 연락이 끊겼다. 그는 남자가 기억하는 그대로의 모습이었고 옛날과 달라진 것이 없었다. 그는 굳은 얼굴로 남자를 보다가 다짜고짜 남자의 오른뺨으로 주먹을 날렸다. 문득 처음 담배를 피우던 날이 생각났다. 그래. 그날도 이랬었지. 그가 남자를 때린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는 남자가 입에 물었던 담배를 뺏어 발로 밟고 새로운 담배에 불을 붙여 입에 물었다. 그는 자신이 다른 것은 다 봐줄 수 있어도 단 하나 못 봐주는 것이 자신의 앞에서 새로 담배를 시작하려는 놈들이라고 했다. 몸에 좋지도 않은데 한 번 발들이면 끊기 어렵다는 것이 이유였다. 병장님도 담배 피우시지 않습니까. 선임이 비뚤어진 담배를 고쳐 물었다. 웃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표정이었다.

이건 나한테 한숨 같은 거야. 만병통치약이지.

너한텐 아니겠지만 이라고 그는 덧붙였다. 남자는 콜라를 생각하며 그의 말을 이해했다.  

잠에서 깨보니 옆에 게보린 한 통이 놓여있었다. 이 해에 한 회사 근속 25년을 찍는 그의 아버지가 이거 하나면 뭐든 낫는다며 깨물어 삼키던 그의 보물이었다.

하프 마라톤 경주의 당일 알림 문자가 왔다. 닫힌 문밖에서는 아버지가 기침하는 소리와 개그맨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의 머리맡에는 식어버린 물과 아직 덜 먹은 약봉지, 그리고 게보린이 있었다. 전기장판은 쉴 틈도 없이 자신의 몸을 덥혀주고 있었다. 컵에 담긴 물에 몇 개 떠 있는 먼지를 보고 그는 문밖으로 기어나갔다. 그의 아버지는 콜라를 마시고 있었다. 왜 뭐 필요한 거 있냐. 원래는 도통 자신의 것을 나눠 마시지 않는 그의 아버지는 그가 두 손과 무릎으로 바닥을 짚고 있는 것을 물끄러미 보더니 자신이 먹던 콜라 캔을 내밀었다.

약은 먹었냐.

이제 먹을 거예요.

캔을 받아들고 방으로 들어와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일주일이 넘게 만나지 못한 것은 오랜만이었다. 신호음이 길게 이어진 끝에 전화를 받은 그녀의 목소리는 시끄러운 음악 소리에 묻혀 잘 들리지 않았다. 텔레비전으로만 들을 수 있던 사람들의 소란스러움도 들려왔다. 그냥 보고 싶어서. 그녀는 잘 들리지 않는다는 말만을 반복했다. 끊으려던 그에게 그녀는 문득 생각난 듯 그거, 해봤어? 하고 물었다. 그게 뭐야. 그거 있잖아. 허리에 좋은 동작. 고양이 자세. 남자는 허리에 직접적인 자극이 가는 자세라 허리가 더 아플지도 몰라서 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녀는 혀를 찼다. 그런 건 해 봐야 알지. 아무튼 시도라도 해 봐. 전화가 끊겼다.

부른 배도, 전기장판의 후끈함도 답답하게 느껴졌다. 남자는 문손잡이에 걸려 있는 아버지의 파카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꼬깃꼬깃한 담뱃갑에 두 개비 정도가 남아있었다. 모든 만병통치약이 그의 머리맡에 놓여 있었다. 그는 게보린을 한 알 꺼내 입에 물고 반쯤 남은 콜라를 머금어 함께 삼켰다. 그다음에 담배에 불을 붙이고 입에 문 뒤 두 손과 두 무릎을 바닥에 단단히 고정했다. 괴상하다고 생각하며 보았던 모델들의 자세를 떠올렸다. 하나, 둘, 셋. 남자의 몸이 활처럼 크게 휘었다. 오랜 시간 굳어 있던 허리가 우두둑 소리를 냈다. 머리의 피가 아래로 쏠렸다. 숨을 쉬기가 힘들어 하마터면 입을 벌릴 뻔했으나 남자는 입의 담배를 이빨로 꽉 깨물었다. 이번엔 아래로 휘어야 했다. 요염하게 배를 바닥으로 내리깔고 있던 분홍색 운동복의 모델이 머리에서 아른거렸다. 아까 그녀와의 전화통화에서 들렸던 노랫소리가 귓가에서 울려 퍼졌다. 모델의 얼굴이 어느새 그녀의 것으로 바뀌어있었다. 하나, 둘, 셋! 허리에 힘이 실리면서 감전된 듯 퍼지는 통증에 버티려던 몸이 채 몇 초도 지나지 않아 아래로 허물어졌다. 남자는 담배를 오른손에 들었다. 벌어진 콧구멍과 입으로 푸른색 연기가 뿜어 나왔다. 핸드폰의 진동이 울림과 동시에 담뱃재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밖에서는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어머니가 온 모양이었다. 남자는 가만히 누워 약들이 그에게 약으로 작용하기를 기다렸다. 동작의 끝에 다다랐을 때의 고통은 한숨 같다던 푸른 연기에 실려 모조리 날아간 것 같았다.

나는 그날 정말로 달렸었던가?

허리의 병은 뼈가 삭아서일 수도 있고 속이 썩어서일 수도 있고 피부병 때문일 수도 있고 스트레스성일 수도 있다. 어쩌면 그 병원 전체가 돌팔이였을 수도 있다. 게보린은 기포가 되어 몸 구석구석으로 퍼져서 그를 견디게 할 것이고 고양이 자세는 요통을 완화하는 것이니 완화를 시킬 것이고 완화가 안 된다면 어쩌면 그의 고통은 요통이 아닐지도 모른다. 마라톤은 시작했으니 끝날 것이고 그의 흰 운동화는 당분간 계속 깨끗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버지는 그 운동화와 그를 계속 번갈아 보며 혀를 찰 수도 있다. 방문이 열린다면 어머니는 담배 연기로 자욱한 안방을 보며 안색이 변할 것이고 이미 며칠 동안 전화를 받지 않았으니 점주는 곧 새 직원을 구할 것이다. 그녀는 언젠가 내 곁을 떠날 것이고 내 발목 또한, 없어질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게 뭐? 모든 것이 대수롭지 않았다. 세계의 모든 만병통치약을 가진 남자에게 그런 것들은 그냥 그런 사실들일 뿐이었다.

배 안에서 무언가가 부글부글 끓었다. 그녀의 필통 안에 있던, 물컵 안에서 서서히 기포로 변해가던 메달 모양의 비타민이 생각났다. 어쩌면 그것처럼, 아버지의 약이 남자의 약에서 녹아서 그때 보았던 남자의 뱃속에서 노란 기포 같은 것들을 만들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고체가 모조리 녹았을 때 투명했던 물은 온통 노랗게 물들었었다. 그녀는 그게 예쁘다고 좋아했었는데 내 뱃속 보이지 않는 어두운 곳에서도 그 모습 그대로 똑같이, 노란빛으로 예쁠지도 모른다고 남자는 생각했다. 요통아 물러가라. 피부병아 물러가라. 없는 두통도 치통도 생리통도 모조리 물러가라. 하얗던 천장이 연기에 가려 회색으로 보였다. 방문이 열렸다. 자욱한 안개의 일부가 틈으로 보이는 것도 같은 어머니의 형형한 눈빛으로 빨려 들어갔다. 적어도 어떤 것들은 예상대로 되겠지. 남자의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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