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일반

[2022 만해축전 전국고교생백일장]심사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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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햇살이 이마에 따갑게 닿던 날 심사를 마쳤다. 심사위원들은 특정한 예술고등학교에 재학 중인 학생들의 시에 대해 먼저 우려를 표시했다. 이들의 시는 능숙한 솜씨를 바탕으로 시의 전개가 매끄럽고 묘사가 뛰어난 작품이 대부분이다. 잘 훈련된 것처럼 보이는 이 시들은 소재 선택과 이미지 구사에 있어 어떤 고정된 틀 안에 갇혀 있다. 시에 등장하는 인물은 가난하거나 병약한 가족들이고 시의 공간은 저임금의 노동현장이거나 어둡고 습한 삶이 어른거리는 곳이다. 그리하여 독자가 ‘안습’하도록 하는 이런 유형의 시들, 이제 지겹다. 시의 언어는 갇히고 고이는 순간 썩는다. 나쁜 전형으로부터 어서 빠져나오라. 대상의 영예를 안은 최나영의 작품은 이런 우리의 우려를 말끔히 씻어내 준 수작이다. 엄마와 나 사이에 형성된 미묘한 거리를 종이컵에 남은 잇자국을 통해 보여주는 이 시의 신선한 기운은 매우 매력적이다. 그리고 최지우의 발랄하면서도 당돌한 어투, 홍성준의 촘촘한 관찰의 시선도 기억에 남는다. 시가 여전히 우리 곁에 있는 이유는 자신만의 형식과 언어로 구태의연한 세상에 맞서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미래의 시인들이여, 자신을 철저하게 격파한 뒤에 큰 강을 건너라.

△산문=올해로 스물네 살이 된 만해축전 학생백일장. ‘한 뼘’과 ‘삭제’가 시제로 주어졌는데 전국에서 많은 고교생이 응모했다. 특히 산문의 응모 편수는 4백여 편으로 운문 쪽 응모 편수를 크게 앞질렀다. 바야흐로 우리 시대는 산문을 필요로 하는 시대가 된건가? 여러 생각이 스쳤다. ‘삭제’는 컴퓨터와 핸드폰을 쓰고 스마트기기로 영상을 만드는 일상에서 아주 친숙하기까지 한 낱말이다. 마음만 먹으면 한순간에 없앨 수 있는 것. 매정하고 무자비한 시대정신의 반영일 것이다. 그리고 ‘한 뼘’은 몹시 가깝거나, 혹은 상대적 빈약, 사소함을 연상하게 한다. 이 시제로 다양한 내용을 매만져 형상화한 학생들의 산문 작업 능력이 탁월해서 놀랍고 기뻤다. 고양일고 2학년의 권효민 학생. ‘삭제’를 선택해 글을 썼다. 교통사고로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와 단둘이 사는 주인공. 어머니는 밤늦도록 일한다. 흰옷을 좋아하는 어머니는 특히 흰옷을 입고 나간 날이면 옷에 오물을 묻혀서 돌아오고 나는 그 옷을 세탁기에 돌린다. 세탁기로 지우려는 흔적은 고단함, 빈곤 등일 것이다. 노원고 2학년 신움파 학생. ‘삭제’를 선택했다. 역시 지우고 싶은 것, 부조리한 사회, 불평등한 현실의 삭제일 것이다. 더군다나 삭제의 굴절들. 쉽지 않은 사회의 단면을 잘 드러냈다. 응모하신 학생들께 감사를 보낸다. 자신의 뜻을 굽히지 말고 정진하길 바란다.

△시조=온라인 백일장 시조 분야는 좀 적게 들어왔다. 다행히 형식을 잘 갖춘 시조들이 속속 건네졌다. 참신한 시제만큼이나 디지털 세대와 현 세태를 반영한 작품이 많았다. 현대의 복잡성을 정형에 담아내기가 쉽지 않은데 형식의 내면화도 꽤 보였다. 먼저 이정윤의 ‘삭제’가 도드라졌다. 현대인의 내면에 담긴 ‘지움의 동작’을 심리와 엮어내는 발상을 잘 살렸다. 걸음마저 기계적이 된 ‘도시인’ 모습이나 고갯짓 안팎에서 잡아낸 “불쾌한 평화”라는 역설까지, 관찰과 표현도 뛰어나다. 다음으로 신주희의 ‘한 뼘의 나팔꽃’이 마음을 끌었다. 아버지에게 다가가는 딸의 심정을 나팔꽃에 빗대 섬세하게 그렸다. 그 거리를 다시 보는 시선이나 ‘아버지의 속도’에 맞추려는 마음의 보폭이 호소력을 빚는다. 시조는 정형시다. 형식에 녹아들지 못하면 내용도 겉돈다. 입으로 뇌어보며 리듬과 잘 놀게 시상을 다듬어야 정형의 매력이 빛난다. 도전과 정진을 바란다.

■심사위원

◇심사위원장=안도현 시인(시 부문), 이경자 소설가(산문 부문), 정수자 시조시인(시조 부문)

◇심사위원=손택수, 박제영(이상 시부문), 한지혜, 김종광, 김현서, 한차현(이상 산문부문)

◇심사진행=이홍섭 시인, 김도연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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