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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칼럼] 울산바위와 생트 빅투아르 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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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선이 명지대 디지털미디어학과 겸임교수

춘분에 눈 내린 날 오후, 설악산 울산바위를 보러 갔다. 병풍처럼 우뚝 솟은 바위는 꼭대기에서 비추는 햇살을 역광으로 받으며 희끗희끗 쌓인 눈이 음영을 더해, 어느 때보다 더 늠름한 자태가 한 눈 가득 들어왔다. 이른 아침 동쪽에서 가득 쏟아지는 햇빛으로 붉게 빛나는 모습에 숨 막힌 적도 있고, 거대한 바위 위로 보름달 떠오른 풍경이 이 세상 아닌 듯 아득했던 기억도 있다. 문득 궁금증이 들었다. 울산바위는 사계절 어느 시간, 어느 위치에서 보는 모습이 가장 멋질까? 몇십 번을 봤지만 언제나 다른 모습, 언제나 다른 느낌이었는데.

코로나19로 발 묶이기 직전, 오래전부터 꿈꾸어왔던 남프랑스 혼행(혼자 여행)을 했다. 새로 짓기 전 양양 시외버스터미널을 연상시키는 아비뇽 버스터미널에서 액상프로방스 왕복표를 사들고 뚜벅이 여행에 나섰다. 인상파 화가이며, 추상파의 아버지로 여겨지는 세잔의 고향인 그곳은 화가의 발자취를 찾는 여행자들로 북적였다. 시내 한가운데, 등산복 차림에 화구를 둘러메고 길을 나서는 세잔 동상을 출발점 삼아 그의 발자취를 따라나섰다. 시내 중심가를 조금 벗어나 언덕에 오르면 세잔의 화실이 있다. 관람료 6유로(약 9,000원)를 내고 햇살이 비껴드는 화실을 둘러보는 것만으론 성이 차지 않는다. 세잔이 그림 그리러 오르던 화가들의 언덕(Terrain des Peintres)까지 가보기로 했다.

내가 갔던 날은 너무 너무 너무 더워서 남프랑스가 아니라 북아프리카 아닌가 생각이 들 정도였지만, 꼭 가야만 할 이유가 있었다. 생트 빅투아르 산. 해발 1,100m의 돌산인데, 세잔은 시간마다 계절마다 보는 위치마다 변하는 그 산의 풍경을 무려 80여 점이나 남겼다. 바위의 거친 결을 살린 작품도 있고, 산 전면의 소나무가 더 인상적인 작품도 있다. 그 생트 빅투아르산이 한 눈에 보인다는 여행 안내문 한 줄에 이끌려 43°54′45.58″N, 5°44′42.29″E 좌표를 찍고 땀조차 하얗게 마르는 땡볕에 길을 나섰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오르다 갑자기 눈 앞에 펼쳐진 풍경에 숨이 탁 막혔다. 하얗게 빛나는 바위산이 보였다. 순간, 허탈하기도 했다. 인상파의 눈을 갖지 못한 탓인지, 내 눈에는 너무나 평범한 바위산이었기 때문이다. 예술가 잘 만난 덕에 ‘과대포장’ 된 거 아냐? 하고 혼자 웃기도 했다.

눈 쌓인 울산바위를 보며 생트 빅투아르 산의 유명세가 떠올라 좀 억울했다. 장쾌하면서도 아름다운 자태로는 세계 어떤 풍광보다 멋진데, 아직은 예술의 눈으로 조명되지 못한 자연 그대로의 모습만 있을 뿐인 울산 바위. 몇 해 전 울산바위의 사계절을 여러 방향에서 화폭에 담은 화가가 속초의 한 식당 2층 갤러리카페에서 전시회를 했다고 한다. 아쉽게 그 전시회를 못 봤지만, 누군가 울산 바위의 아름다움을 예술로 승화시키고 있다니 기쁘다. 설악산과 동해라는 천혜의 자연환경을 지닌 속초시와 고성군에 울산바위 미술관이 생기면 얼마나 좋을까. 대형 리조트가 최고의 전망 포인트를 독차지하고, 값비싼 차를 마셔야 그 절세가인을 바라볼 수 있다면 너무 야속하다. 울산바위 덕을 톡톡히 보는 대형 리조트기업들이 스폰서가 되어 울산바위 미술 국제공모전이라도 열었으면 좋겠다. 당선작들을 모아 미술관을 만들 수도 있지 않을까? 38° 11′ 36.6″ N, 128° 28′ 32.6″E 좌표를 향해, 세계인들이 발길을 재촉하는 데는 예술로 승화된 울산바위의 새로운 위상이 첩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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