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일반

[한민족 4천년 역사에서 결정적인 20장면]4세기 왕권 장악한 '신라 金씨' 흉노 왕자의 후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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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흠 강원도 국제관계대사

◇7세기 말 세워진 신라 문무왕릉비에는 '김씨 왕실은 투르크(터키)계 흉노 왕자였던 김일제의 후손'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김수로(金首露·김+쇠를 뜻하는 수로)'와 마찬가지로 '김알지(金·Gold)+알지(알티·Gold)'도 동어(同語) 반복이다. '알타이(Altai) 산맥'의 '알타이'는 '금(金)'이라는 뜻이다. 사진은 알타이산맥 풍경.사진=Ms. Sakhno 제공◇가야무사상:국립중앙박물관 (백범흠 박사 촬영)

기원전 121년 흉노 왕자 서한에 끌려가…무제, 암살 막은 공로로 '김씨' 사성

김일제 후손 1세기 한반도 해안따라 남하…신라 김씨 시조 놓고 해석 분분

신라 6세기 한반도 중부 패권 놓고 금관가야·탁순국·대가야 차례로 정복

# 서한에 포로로 잡혀간 흉노 왕자

기원전 121년 서한(전한)의 곽거병 군대가 흉노제국 땅이던 치렌산(祁連山)과 하서회랑(河西回廊) 일대로 쳐 들어가 흉노군을 격파했다. 하서회랑을 통치하던 흉노 혼야왕은 제국의 지배자인 이치사 선우의 문책이 두려워 투항에 반대하는 휴저왕을 죽이고 서한에 투항했다. 곽거병은 혼야왕이 넘겨준 휴저왕의 왕비와 14세 왕자 등을 포로로 잡아 장안(시안)으로 끌고 갔다. 흉노 왕자는 나중에 서한 무제(武帝) 암살을 막은 공을 세워 마감(馬監)에 임명됐다. 무제는 휴저왕이 금인(金人)을 모시고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는 것을 고려, 흉노 왕자에게 '김(金)'을 사성(賜姓)하고, '일제'라는 이름을 줬다. 김일제는 거기장군까지 승진하고 투후(?候)에 봉해졌다. 김일제는 산둥 허저시(荷澤市) 진청(金城)을 도읍으로 제후국 투국을 세웠다. 무제 시기 서한 궁정에는 종종 피바람이 불었다. 무제는 신하들은 물론 처자식들에게도 무자비했다. 무제는 말년 오(吳) 황제 손권처럼 노망이 나 황후를 자살하게 만들고, 황태자 부부마저 죽음으로 내몰았다. 신중히 처신했던 김일제는 기원전 87년 곽광 등과 함께 무제의 후계자를 책임지는 고명대신(顧命大臣)이 됐다. 실력자가 된 것이다. 김일제의 후손은 서한시대에는 번성했으나 1세기 초 인척 왕망(王莽)이 서한을 찬탈, 신(新)나라를 세우는데 협조한 까닭에 동한(후한) 광무제에 의해 투국이 폐지되는 등 동한시대에는 쇠락했다.

7세기 말 세워진 신라 문무왕릉비에는 '투후제천지윤전칠엽이…(?侯祭天之胤傳七葉以…), 십오대조성한왕(十五代祖星漢王), 강질원궁탄영산악조림(降質圓穹誕靈山岳肇臨)'이라는 구절이 있다. “투후 이래 7대를 이어 갔으며, (문무왕의) 15대조 성한왕(김세한, 김알지와 동일인으로 추정)은 신령한 산(계림)에 바탕을 내리고, (신라 김씨 왕실의) 시조가 되었다”는 뜻이다. 김씨 왕실은 투르크(터키)계 흉노 왕자였던 김일제의 후손이라는 것이다. '김수로(金首露·김+쇠를 뜻하는 수로)'와 마찬가지로 '김알지(金·Gold)+알지(알티·Gold)'도 동어(同語) 반복이다. '알타이(Altai) 산맥'의 '알타이'는 '금(金)'이라는 뜻이다. '박혁거세'의 '박(밝)'은 '혁(불·火)'과 같은 뜻이다. 당나라 시기인 864년 시안에서 사망한 김씨 부인(신라 출신 관료 김공량의 딸) 묘비명에도 김씨의 조상이 김일제라고 쓰여 있다. 김씨 부인 묘지(墓誌)는 '서한이 덕을 드러내지 않아 난리가 나서 김씨들이 괴로움을 겪게 되자 랴오둥(遼東)으로 달아나 숨어살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 김일제 후손, 1세기 한반도 따라 남하했나

김일제의 후손들은 1세기 서한-신-동한이 교체되던 혼란기에 산둥반도에서 출발, 한반도 해안을 따라 남하해 후진 지역이던 경주 일대에 유입된 것으로 보인다. 대동강 유역 낙랑으로 유입됐다가 소백산맥을 넘어 상주(사벌)를 거쳐 경주(서라벌)로 들어왔다는 설도 있다. 신라 김씨가 김일제의 후손이라는 근거는 아래와 같다. 반론도 있다.

① 문무왕의 아들 신문왕이 문무왕 비문에서 신라 김씨가 김일제의 후손이라고 밝혔다.

② 김알지 세력은 서한-신-동한이 교차하던 1세기경 경주평야에 출현했다.

③ 4세기 이후 경주에 등장하기 시작한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 역시 스키타이, 흉노 계열 묘제(쿠르간)와 유사하다. 금관, 팔찌를 비롯한 신라의 금(金) 숭배 문화는 스키타이-흉노 계열로 해석된다.

④ 초기 신라 유적에서 페르시아식 금제 칼과 마구(馬具) 포함, 말 관련 유물이 많이 발견됐는데, 이는 스키타이, 흉노를 통해 들어온 것이다.

⑤ 신라인 유골 DNA를 검사한 결과 스키타이 등 유라시아 요소가 많이 발견됐다.

반론과 재반박은 다음과 같다.

첫째, 김알지 세력이 경주에 나타난 때는 서한-신-동한 교체기인 1세기경이나, 흉노 양식이라는 돌무지덧널무덤의 등장은 4세기경이다. 4세기는 고구려 미천왕의 낙랑 정복(313년)과 관련이 있다. 돌무지덧널무덤은 흉노 문화의 영향을 받은 낙랑의 예맥계 유민들의 경주 유입 결과로 보인다.

반론:김씨 출신 신라 최초의 왕 미추닛금(이사금)이 3세기 말(262~284년) 재위했으므로 대형 돌무지덧널무덤은 4세기경에나 등장할 수밖에 없었다. 둘째, 7세기 말 삼국 통일 시기인 문무왕, 신문왕 시대 김씨 왕실이 모화사상(慕華思想)에 젖어 중국 오제(五帝)의 하나인 순(舜) 임금과 함께 서한 고위관료 김일제를 조상으로 끌어들였을 것이다.

반론:오랑캐 선비족 대야씨(大野氏) 출신 당나라 황실도 한족 명문 농서 이씨 후예라고 주장한 당시 상황에 비춰 볼 때 신라 김씨 왕족이 굳이 오랑캐 흉노제국 출신을 직계 조상으로 끌어들일 이유가 없다. 한편, 신라 왕실을 구성한 박씨(朴氏)와 석씨(昔氏) 역시 2차 이주민들이었다. 박씨는 북방계, 석씨는 해양계로 보인다. 김알지가 (투르크계) 흉노 출신이고, 박혁거세와 석탈해도 2차 이주민 출신이라는 점에서 신라 골품제는 혹 인종적 차이에 기초했던 것은 아닐까?

# 한반도 중부 패권 다툼

나물마리칸(재위 356~402년) 이후 김알지의 후손들이 신라 왕권을 장악했다. 한편, 4세기 말 이후 고구려가 백제와 신라 모두를 강하게 압박하자 낙동강 하류로부터 선진 기술을 흡수한 낙동강 중류 고령 중심 대가야(반파국)가 크게 성장했다. 금관가야와 마찬가지로 대가야도 현대 일본인의 주류가 된 야요이계로 보인다. 대가야는 소백산맥을 넘어 진안고원 일대와 섬진강 하구(河口), (일시적으로) 광주, 정읍, 부안까지 확보했다. 중국 강남의 남제(南齊)에 직접 사신을 파견할 정도가 됐다. 장수왕 치하 고구려는 신라가 눌지마리칸 재위기(417~458년) 신라 주둔 고구려 병사를 살해하는 등 독립을 시도하자 신라에 군사적 압박을 가했다. 장수왕 말기인 481년(신라 소지마리칸 시기) 고구려군은 동해안을 따라 포항까지 남진해 왔다. 포항에서 수도 경주까지는 20~30여㎞에 불과하다. 신라는 다시 한번 멸망의 위기에 전율했다. 불과 6년 전인 475년 수도 한성이 무너지고, 국왕(개로왕)이 참살당한 백제와 함께 대가야도 지원군을 파견했다. 신라-백제-대가야 연합군은 고구려군을 울진까지 밀어냈다. 이 무렵 백제계, 가야계 인사들의 왜 조정 진출이 더 활발해졌다. 켈트(갈리아), 로마(라틴), 게르만(앵글로·색슨), 노르만이 대거 이주했던 브리튼섬과 같이 일본 열도도 신천지에 가까웠다.

문자왕(재위 491~519년) 말기부터 고구려의 내정 혼란이 심해졌다. 게다가 고구려는 몽골고원의 신흥세력 돌궐(突厥)의 동진을 저지하고자 주력을 시라무렌강(랴오허의 서북쪽 지류) 유역에 집중시킬 수밖에 없었다. 기회를 틈탄 백제(무령왕)는 512년과 513년 모루와 대사 등 백제 동남부와 인접한 가야 7개 도시국가를 정복했다. 백제의 공세에 위기를 느낀 신라(법흥왕)는 529년경 대가야 한기(왕)에게 왕족 여인을 출가시키고, 간첩을 파견하는 등 하이브리드(Hybrid) 공세를 집중했다. 생존 위기를 느낀 안라가야(함안)는 같은 해 여타 가야 소국들의 지지를 받아 백제, 신라, 왜 등의 대표들을 초청, 국제평화회의를 주최했다. 안라평화회의는 성과 없이 끝났다.

백제는 530년경 서부 안라가야 대부분을 점령했다. 신라는 532년 김이사부로 하여금 금관가야(김해)를 정복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신라는 538년 탁순국(창원가야)도 정복했다. 백제(성왕)는 541년과 544년 사비성에서 왜 사신과 함께 대가야, 안라, 다라(합천) 포함, 가야소국 대표들을 소집, 금관가야 등의 복구를 위한 국제회의를 주최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신라와 백제는 대(對)고구려 정책에서는 타협, 신라군은 진흥왕 재위기인 551년 대가야군을 아우른 백제군과 함께 북진, 고구려 영토이던 춘천, 인제, 철원 포함, 한강 중·상류 일대를 점령했다. 신라는 죽령 너머 남한강 유역으로 진출하는 과정에서 금관가야인들을 충주·단양·원주 등으로 사민(徙民·피지배 집단의 주거지를 강제로 옮기는 것)시켜 처음에는 고구려, 나중에는 백제와의 전투 시 지원 부대로 활용했다.

고구려(양원왕)는 나·제(羅濟)의 공세에 대응, 신라와 밀약을 맺어 신라-백제 간 싸움을 붙였다. 고구려는 한반도 중부의 패권을 놓고 벌어진 신라와 백제·대가야·왜 연합군 간 553년 관산성(옥천) 전투를 전후해 신라와 백제가 서로 싸우는 틈을 이용, 주력을 서북부 국경에 집중시켜 돌궐의 침공에 대응할 수 있었다. 백제 성왕이 전사하기까지 한 관산성 전투 6년 뒤인 559년 신라는 안라가야의 항복을 받았다. 그로부터 3년 뒤인 562년, 김이사부와 김사다함이 이끄는 신라군이 대가야마저 정복했다. 신라군은 이때 창녕(비화가야)에도 쳐들어갔다(창녕 순수비). 백제·왜 연합군의 지원도 대가야의 멸망을 막지 못했다. 왜왕 킨메이(欽明)는 대가야를 멸망시킨 신라에 대해 분노를 쏟아냈다. 대가야 왕족, 귀족 대부분은 언어가 통하는 일본 열도로 도피하고, 잔여 백성 다수는 대(對)고구려 전선인 삼척·강릉 지역으로 이주당했다.

568년 김거칠부(김구례이사지우내사마리) 등이 지휘한 신라군은 하슬라(강릉)를 넘어 동해안을 따라 북진, 함흥평야를 점령하고 개마고원으로 넘어가는 황초령과 마운령에 척경비(拓境碑)를 세웠다. 서북부 방어를 더 중시한 고구려 평원왕은 군사들로 하여금 평양으로 이어지는 마식령(馬息嶺) 등 요충지를 지키게만 할 뿐이었다. 신라의 금관가야, 대가야, 안라가야 병탄으로 인해 백제는 신라에게 옆구리를 내어주는 형세로 몰렸다. 한반도의 대표적 평야지대 한강과 낙동강 유역을 놓고 벌인 신라와의 경쟁에서 패배한 백제는 무왕, 의자왕 초기의 부흥에도 불구, 대가야가 정복된 지 불과 1세기 뒤 멸망한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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