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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해축전 전국고교백일장
교복·친환경 급식 지원 등 지자체 교육청 협력사업 '빨간불'
강원청소년동계올림픽의 불꽃 피어올랐다
2024강원청소년동계올림픽을 밝힐 성화가 3일 고대 올림픽의 발상지인 그리스 아테네에서 채화됐다. 청소년동계올림픽 개막을 108일 앞두고 올림픽의 불꽃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앞으로 성화가 전국 및 강원특별...
제3회 김유정 학술상에 표정옥 숙명여대 교수
강원일보와 김유정문학촌, 김유정학회가 공동 주관하는 ‘제3회 김유정 학술상’ 수상자에 표정옥(53·사진) 숙명여대 기초교양대학 교수가 선정됐다.김유정학술상위원회는 최근 가장 많은 추천을 받은 후보자 4인에...
道 연고 김희중 국장 ‘경찰 서열 2위’ 치안정감 승진
강원도 연고인 김희중(58·사진) 행정안전부 경찰국장이 경찰 서열 2위 계급인 치안정감으로 승진했다. 경찰청은 지난달 27일 김희중 국장과 김수환(경찰대 9기) 경찰청 공공안녕정보국장을 치안정감으로 승진 내...
원주 치악로 국도서 화물차에 치인 80대 숨져
4일 새벽 원주 국도에서 화물차에 치인 80대가 심정지 상태에서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숨졌다. 경찰에 따르면 이날 오전 2시 40분께 강원 원주시 판부면 치악로 5번 국도에서 50대 A씨가 몰던 25t 화물차가 길을 ...
세계산림엑스포 관람객 40만 돌파…한글날 연휴 2차 흥행가도 달린다
추석 연휴 마지막 날인 3일 2023강원세계산림엑스포 누적 관람객이 40만명을 돌파했다. 한글날 연휴와 단풍철을 앞두고 있는데다 단체관람객이 줄을 잇는 등 관람객도 꾸준히 증가하고 있어 당초 목표로 했던 관...
세계산림엑스포 2천평 힐링광장에서 ‘여유 만끽’
2023강원세계산림엑스포의 킬러 콘텐츠인 푸른지구관의 대형 미디어아트와 6,600㎡(2,000평) 규모의 힐링광장이 큰 인기를 누리고 있다. 잔디밭으로 조성된 힐링광장에는 자작나무로 만든 인디언집 두 채, 참나무...
경찰·소방, ‘산림엑스포 안전’ 물 샐틈없는 지원
2023강원세계산림엑스포가 흥행가도를 달리고 있는 가운데 경찰과 소방의 물 샐틈 없는 지원과 선행이 대회 안전에 큰 도움이 되고 있다. 강원세계산림엑스포 조직위원회에 따르면 행사장 내 경찰 1개 기동대 20...
강원 자원봉사자 따뜻한 미소로 성공 개최 견인
2023 강원세계산림엑스포의 성공적인 개최를 위해 도내 자원봉사자들이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강원세계산림엑스포가 열리는 고성, 속초, 인제, 양양 4개 시·군에서는 지난달 22일부터 대회가 끝날 때까지 연인원 ...
길어진 추석 연휴 후유증…산더미 이룬 쓰레기
6일 동안 이어진 긴 추석 연휴, 배출일을 지키지 않은 채 쌓인 쓰레기로 강원지역 도심 곳곳이 몸살을 앓았다. 추석 당일인 지난달 29일 강릉시 교동의 한 주택가. 쓰레기 배출이 금지된 날이었지만, 과일과 고기...
명절연휴 특수, 전통시장·소상공인 '희비'
같은 추석 명절 연휴였지만 강원특별자치도 내 전통시장과 소상공인들이 느낀 체감 경기는 극명한 온도차이를 보였다. 전통시장은 성수품 구매 수요와 관광객이 집중되며 매출 증대 효과를 누린 반면, 소상공인...
"국회만 가면 왜 싸우나"… 정치권 향한 강원권 추석민심 싸늘
추석 명절 정치권에 대한 강원지역 민심은 그 어느 때보다도 싸늘했다. 여야 모두 연일 정쟁에만 몰두하면서 코로나19 종식 이후에도 나아질 줄 모르는 경기 침체를 살피지 않고 있다며 민생경제 회복에 힘을 모...
인명사고로 얼룩진 추석 연휴 강원…사망자 속출
동해안을 비롯한 강원지역 주요 관광지에 추석 황금연휴를 즐기기 위한 인파가 몰린 가운데 각종 사건·사고도 속출했다. 지난 2일 오후 5시13분께 강릉시 견소동 강릉항 인근 테트라포드에서 공군 부사관 A(45)씨...
추석연휴 화천서 로또 1등 17억 대박
추석연휴 화천에서 로또 1등 당첨자가 나왔다. 3일 동행복권에 따르면 제1,087회 로또 1등 당첨번호 '13, 14, 18, 21, 34, 44'를 모두 맞춘 1등이 화천군 화천읍을 비롯한 전국 16개 판매점에서 배출됐다. 로또 1...
‘어린이 통학버스 추월해 급제동’ 보복운전 늘어도 처벌 솜방망이
대형사고를 유발할 수 있는 '보복·난폭 운전'이 늘고 있지만 처벌 수위는 솜방망이에 그치고 있다. 가해자가 경찰에 구속되거나 재판에 넘겨지는 사례는 드문 것으로 나타났다. 3일 경찰청에 따르면 보복·난...
강원NIE(신문활용교육)대회 대상에 육민관중
원주 육민관중이 제17회 강원NIE(신문활용교육)대회에서 단체 대상을 수상했다. 강원일보사와 한림대(총장:최양희)가 공동 주최한 제17회 강원NIE대회는 신문일기와 동아리신문, 진로포트폴리오 등 5개 부문으로...
강원 출생아 4개월째 전년 대비 역대 최소 … 인구 자연감소 84개월째
강원특별자치도 내 출생아 수가 넉 달 연속 같은 달 기준 역대 최소를 기록했다. 출생아보다 사망자 수가 더 많은 ‘인구 자연감소’는 84개월째 이어졌다. 통계청이 발표한 ‘2023년 7월 인구동향’에 따르면 7월 ...
명절 끝, 국정감사·당무감사·현역평가 줄줄이… 공천준비 시작
여야가 추석 명절이 끝나고 곧바로 현역 국회의원들의 평가에 돌입하면서 공천경쟁이 가열될 전망이다. 국민의힘과 더불어민주당 모두 올 연말 공직선거후보자추천관리위원회를 구성하기에 앞서 공천작업의 기초...
연휴 끝 출근길 ‘쌀쌀’…영서지역 20㎜ 안팎 비소식
긴 추석 연휴가 끝난 4일 강원지역에는 서늘한 가을날씨가 이어지겠다. 강원지방기상청에 따르면 4일 오전 강원지역은 중국 산둥반도 부근에 위치한 고기압의 영향으로 대체로 맑을 전망이다. 아침 최저기온은 ...
동내면 행정복합타운 초입에 법조타운 조성…법원·검찰청 부지 3배로 커진다
【춘천】 강원자치도청 신청사가 들어서는 동내면 고은리 행정복합타운 주진입로 초입에 새로운 법조 거리가 조성될 전망이다. 강원자치도와 춘천시에 따르면 지난달 행정복합타운 이전 협약을 맺은 춘천지법과 ...
국비 928억원 덜 받는 원주시 '긴축 재정' 예고
【원주】원주시가 '초긴축 재정'을 예고했다. 원주시는 전국적인 재정위기 상황에 따라 928억원 규모의 지방교부세가 줄어들 것으로 예상된다고 3일 밝혔다. 올해 말까지 3개월을 남겨둔 시점에서 당초 내시된 ...
"식당인줄 알았어요" 안내표지판도 없는 '보물' 강릉 해운정
【강릉】보물 제183호 강릉 해운정(海雲亭)에 안내 표지판이 없어 개선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3일 방문한 강릉 운정동 해운정 인근의 관광 표지판에서는 ‘해운정’ 관련 표시를 찾아볼 수 없었다. 가까운...
[권혁순칼럼] '극한 정치' 끝은 어디인가
[강원포럼] 횡성한우축제의 새 역사
[확대경] 문해력 교육에 과감한 투자를
언중언
‘남북 탁구’
사설
여야 민생 살리기, 말보다 실천으로 옮겨야 한다
2050년 도민 2명 중 1명 노인, 고령화 대책 마련해야
[특집] “한국형 인공지능·빅데이터 기술로 지역혁신 이끌자”
강원자치도 제조업체들 부진 이어져
[포토뉴스] 천고마비의 계절
“오대산에서 펼쳐진 신비로운 이야기”
3명의 배우들이 선보이는 1인 공연…“세 명의 체홉”
“연극으로 수몰민의 아픔 위로한다”
삼악시동인회 시화전 …춘천시청 2층 실내 정원
강릉교회 의료선교부, 추석 연휴에 필리핀서 의료봉사 훈훈
춘천 서면 문인회 발족
반환점 돈 항저우 아시안게임, 강원 전사들 맹활약
2022 항저우 아시안게임(AG)이 어느덧 반환점을 돌았다. 대한민국 선수단이 3일 오후 3시30분 현재 금메달 31개로 목표인 금메달 50개를 향해 순항 중인 가운데 강원 전사들이 대한민국의 메달 레이스를 주도하고...
[4일의 아시안게임]강원FC 이광연, 한국 3연패 수문장 될까
[항저우 아시안게임]‘삼척시청 주축’ 여자 핸드볼, 결승 진출
김진태 강원자치도지사 “손흥민 유럽 200골 축하”
[영상]2023강원세계산림엑스포 개막
철원인구 4만명 붕괴 눈앞 … 철원군 주소이전 캠페인 돌입
홍천 하오안리 마을·학교 인근 연구원 매연 배출 논란
"오랍드리 산소길 걷기 12일까지 신청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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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힌 마산방어전투, 기념관 건립해 기억해야
기념(記念). 뜻깊은 일이나 사건을 잊지 않고 마음에 되새김. 전쟁기념관은 ‘잊지 말자’는 의미를 담고 있다. 마산방어전투기념관을 통해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나라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바친 군인들과 자유민주주의이다. 만약 이 두 가지를 잊는다면 아픈 역사는 반복될 수 있다.마산방어전투는 지난 1950년 8월 1일부터 9월 14일까지 45일간 마산 일대에서 한미 동맹군과 인민군 간 벌인 전투다. 이 기간 핵심 격전지였던 서북산은 고지의 주인이 19번이나 뒤바뀌었고 인민군 4,000여명과 미군 1,000여명이 희생됐을 정도로 큰 규모의 전투였다. 하지만, 미군 주도 전투라는 이유 등으로 기념관 하나 없이 잊혀 가고 있다.이러한 현실 속 기념사업회가 발족하고, 여러 선양 사업이 진행되면서 점차 시민들과 지역사회에서 마산방어전투가 알려졌다. 미래세대를 위한 교육의 장이 될 기념관 설립의 필요성 또한 커지고 있어 주목을 모으고 있다.■최초 한미연합 작전= 1950년 8월 1일 북한군은 남침 36일 만에 진주를 점령한 데 이어 마산 현동 검문소에 집결했다. 중국 국공내전에 참전해 전쟁 경험이 풍부한 조선족들로 구성된 북한군 6사단 7,000여명은 함안·진동 고산지대를 확보 후 마산 점령을 노리고 있었다. 당시 이 일대를 주둔하고 있던 국군은 1,000여명에 불과했다. 미 8군 사령관인 워커 중장은 급히 경북 상주에 주둔 중인 미 25보병사단을 250㎞ 넘는 마산으로 단 2일 만에 이동시켰다. 이에 맞춰 진주에서 후퇴한 미 24사단도 창녕에 낙동강 방어선 진지를 구축했다. 마산을 점령하려는 북한과 사수하려는 국군과 미군은 8월 1일부터 9월 14일까지 45일간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결국 마산방어전투에서 아군의 승리로 북한군의 부산 점령을 막을 수 있었고, 국군과 UN군이 재정비할 시간을 벌 수 있었다. 또한 9월 16일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면서 반전의 기회를 가져왔다.마산방어전투가 최초 한미 연합 작전이었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하순복 경남대 군사학과 교수는 "최초 한미연합 작전으로 알려진 다부동 전투는 8월 13일 시작됐지만, 마산방어전투는 그보다 5일 앞선 7일부터 연합 작전을 전개했다"며 "또한 연합 작전은 한명이 지휘체계를 잡고 전투를 지휘해야 하는데 다부동 전투의 경우 그런 성격은 아니었다. 마산방어전투는 국군이 미군에 배속되어 하나의 지휘체계가 형성됐다"고 설명했다.하 교수는 "마산방어전투는 최초의 한미연합작전임과 동시에 한미동맹 출발점이다"며 "연합작전을 통해 피를 나누며 싸웠기에 동맹이 강해졌기에 그 의미가 크다"고 강조했다.■기념관 설립해 선양활동 진행해야= 나라의 운명이 달린 전투였지만, 마산방어전투를 기억할 전쟁기념관 하나 없을 뿐만 아니라 육군사관학교에서 발간한 ‘6·25전쟁 60대 전투’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관련 시설은 해병대진동리지구 전첩비, 서북산 전적비뿐이다. 달성에서 진해까지 낙동강 방어선은 미군 부대가 주력이었기에 그동안 관련 전투들은 관심이 떨어졌다.잊힌 전투를 기억하고자 지난 2021년 '마산방어전투기념사업회'가 창립이 됐고, 다양한 선양 활동이 이어지고 있다. 배대균 마산방어전투기념사업회 회장은 2016년 진해 미 해군 사령관의 추천서를 받아 미국 정부 서류저장처에 보관된 마산방어전투 당시 미 25사단의 전투일지를 확보했다. 이후 3년간 A4용지 500매 분량의 일지를 직접 번역해 책 ‘마산방어전투’를 출간했다. 그는 금속탐지기를 미국에서 직접 사 와 전투일지에 나타난 전적지를 100차례 이상 답사해 탄환, 포탄 파편, 군복 단추 등을 발굴하기도 했다.최근에는 지역 주민들과 함께 전적지를 답사하며 마산방어전투를 알리고 있다. 지난 6월에는 처음으로 학술대회를 개최해 전쟁사 전문가들이 마산방어전투의 중요성에 대해 논하는 자리도 마련됐다. 향후 기념사업회는 기념관 건립 운동과 더불어 토론회, 사진전 등을 개최할 계획이다.■기념관 건립 용역 조사 곧 시작= 창원시는 오는 10월 중 '(가칭) 마산방어전투 재조명 및 기념관 건립 기획 용역' 입찰 공고를 실시한다고 밝혔다. 용역에는 전사 연구와 더불어 부지 선정 등에 대해 논의될 예정이다. 창원시 관계자는 "마산방어전투라는 명칭 자체가 전쟁사에 없다 보니 객관적인 자료를 조사할 예정이다"며 "미군 측에는 자료가 있지만, 한국에는 자료가 부족한 게 현실이다. 용역 자료를 기반으로 기념관 부지와 이름을 정할 계획이다. 용역 기관은 최소 5개월 정도 걸릴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홍남표 창원시장 또한 당선인 시절 인터뷰에서 기념관 건립에 관해 관심을 표했다. 홍 시장은 과거 "낙동강방어선 주요 전투 중 포항·영천·다부동·박진 전투는 많이 알려진 반면, 마산방어전투는 별로 조명을 받지 못 했다. 그런 가운데 지난해 마산의 뜻있는 분들이 민간 차원에서 ‘마산방어전투기념사업회’를 결성해 기념사업을 추진하고 있어 다행스럽게 생각한다”며 “마산방어전투 전적기념비와 기념관 건립도 국가보훈처 차원의 선양사업과 연계해 추진을 적극 검토해야 한다. 민간 차원의 기념사업회의 활동과 지자체 차원의 공론화 과정 등을 거치면서 마산방어전투 의미를 지역은 물론 전국에 널리 알리고, 이를 토대로 기념사업의 방향을 정립해 나가야 할 것으로 본다”고 밝힌 바 있다.■배대균 마산방어전투기념사업회 회장"나라를 살린 마산방어전투, 기념관 통해 잊지 말아야 됩니다."올해 93세인 배대균 마산방어전투기념사업회 회장은 뚜렷이 이렇게 말했다. 배 회장은 90세가 넘는 고령이지만, 직접 마산방어전투 관련 자료를 모으고, 전적지를 답사하고 있다. 만약 그가 미25 사단 전투 일지를 번역해 책을 출판하지 않았더라면, 영영 이 전투는 잊혀 왔을 것이다.그는 "기념관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이 지역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있어야 할 시설"이라며 "6·25전쟁 초기에 마산을 방어해 부산을 지켰기에 나라와 자유민주주의를 지킬 수 있었다"고 강조했다. 이어 "아직 기념관이 없어 잊혀 가고 있는 현실이 답답하지만, 창원시에서 용역을 진행할 예정이라고 하니 상당히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배 회장은 앞으로도 기념사업회를 통해 시민들에게 마산방어전투를 꾸준히 알릴 계획이다. 방어전투 참전자 유해와 유품들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등산로 하나 없는 고지를 올라 직접 발굴을 나선 것도 그였다. "다양한 선양 활동과 언론 등을 통해 점차 시민들이 마산방어전투를 알아가고 있어 뿌듯합니다. 전투를 직접 겪은 마산 지역 주민들도 기념관 건립을 염원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지어질 기념관에 전시될 자료와 증언을 모으고, 유품을 발굴할 생각입니다." 경남신문=박준혁 기자사진1. 마산방어전투 기념사업회는 지난해 12월 마산 일대에서 마산방어전투 전적지 답사를 진행했다. 출처 박준혁 기자사진2. 마산방어전투기념사업회는 지난 6월 처음으로 학술회의를 개최했다. 출처 박준혁 기자사진3. 배대균 마산방어전투기념사업회 회장이 지난해 12월 마산방어전투 전적지들 시민들과 답사하며 전사와 관련해 설명하고 있다. 출처 박준혁 기자사진4. 배대균 마산방어전투기념사업회 회장 출처 박준혁 기자사진5. 책 마산방어전투 표지.
전쟁 후 남은 사람들의 비극, ‘빨치산’
‘빨치산’은 한국전쟁의 부산물이자 분단된 남북 민족분열의 비극을 표출하는 상징이다.빨치산은 프랑스어 ‘파르티잔(partisan)’에서 유래했으며 노동자나 농민 등 비정규 군인들로 무장된 유격대를 뜻한다. 하지만 우리 역사에서 빨치산은 한국전쟁 전후로 좌익 계열과 인민군 패잔병들에 의해 전국의 산지에서 조직된 유격대를 일컫는다.특히 호남에서는 한국전쟁 이후 북한으로 되돌아 가지 못한 인민군들이 지리산의 험준한 사악지형을 이용해 끝까지 저항했고 한국군은 이를 토벌하기 위해 많은 희생을 치렀다.한국전쟁 직후인 1951년 1월부터 4월까지 전남에서 한국군의 게릴라 대규모 토벌작전(3기)에 6,921명의 빨치산이 사살되고 603명이 생포됐다.지리산에서 빨치산을 진압하다가 목숨을 잃은 군인, 경찰, 민간인은 7,287명에 달한다.■한국전쟁은 끝났지만 귀순하지 못한 빨치산=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자 호남 지역에 남아있던 북한군은 퇴각하지 못한 채 지리산 인근에 입산해 빨치산이 됐다.북한군이 후퇴하자 호남·영남·충청 지역에 있던 인민군 및 당 요원들은 퇴로가 차단된 채 남한에 남겨진 이들이었다. 빨치산은 남한의 공산주의자와 북한군 패잔병, 유격대원으로 구성됐다. 이들은 후방에서 교란작전을 펼쳤다.패잔병들은 중앙당으로부터 ‘인민군이 다시 남하할 때를 대비해 후방에서 유격활동을 벌이라’는 지시를 받고 군·경의 눈을 피해 지리산 등 산악지대에서 끝까지 저항을 한 것이다. 특히 관공서를 습격하고 식량을 구하기 위해 민가를 약탈하기도 했다.이들을 진압하기 위해 1950년 10월 이후 군경합동작전이 전개됐고 백야전 전투사령부가 창설돼 빨치산 진압작전을 전개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군병력 이외에도 경찰병력도 많이 동원됐다. 1950년 12월 16일에는 지리산지구전투경찰사령부를 설치했다. 이들은 빨치산 진압작전을 위해 지리산 중심의 주요 고지를 포위·수색하고 근거지를 공격했다. 군경의 주요 시설을 경계·방어하면서 첩보활동을 펼쳤다.군경은 빨치산 진압과 더불어 귀순 유도를 적극적으로 시행했다. 군인과 경찰은 지리산 인근에 ‘삐라’(전단지)를 대량으로 배포해 빨치산의 귀순 유도를 했지만 빨치산들은 귀순보다는 저항을 택하는 경우가 많았다. 빨치산은 인민유격대 전남총사령부와 그 산하 6개 지구대를 창설해 끝까지 저항했다. 6개 지구는 무등산 광주지구, 담양 추월산 가마골 노령지구, 구례·광양 백운지구, 화순 모후산 지구, 장흥 유치지구, 영광·함평 불갑산 지구 등이었다.■빨치산의 근거지, 화순 백아산 전투=빨치산 세가 가장 강했던 곳은 전남도당 본부가 있던 화순 일대로, 이곳에서는 1950년 10월부터 1952년 4월까지 1년 6개월동안 치열한 교전이 벌어졌다.조선노동당 전남도당은 인민군 점령기에 광주에 설치됐던 당 본부를 화순군 백아산 기슭에 있는 북면 용곡리 용촌마을로 옮겼다. 백아산은 해발 810m로 산비탈이 가파른데다 고지가 여러 곳이라 한 곳을 점령당해도 다른 곳으로 이동하기 쉽고, 화순 모후산, 곡성 통명산 등으로 이동하기에도 용이했다. 또한 화순은 화순 탄광 노동자들로 조직된 좌익 세력이 강했으며, 1946년 화순 탄광 노동자 봉기 이후 미 군정의 검거를 피해 많은 좌익 인사들이 산으로 숨어들어 빨치산으로 활동하기도 했다.빨치산은 지리산 곳곳에 거점을 두고 군·경 보급로 차단, 식량 약탈, 경찰서·지서 습격, 통신망 절단, 무기약탈 등을 일삼았다.이에 한국 정부는 1950년 10월부터 국군 11사단을 내려보내 이른바 ‘백아산 소탕전’을 벌였다. 이 때 국군은 ‘성벽을 굳게 하고, 들에 있는 것을 말끔히 치운다’는 ‘견벽청야(堅壁淸野)’ 작전을 폈다. 백아산 주변의 마을을 불태우고 주민을 소개(疏開·폭격 등에 대비해 대피시키는 것)하는 ‘초토화 작전’이었다. 이로 인해 화순군 이서면 21개 마을, 북면 24개 마을, 담양군 남면 대덕면 5개 마을 등 모두 50개 마을이 소각됐다.4월이 되자 11사단을 대신해 8사단이 호남으로 내려왔고, 예하 부대와 전투 경찰대, 청년 방위대 병력을 지휘하여 백아산 지구, 장흥군 유치면 구사봉 지구에서 준동하는 잔류 세력 소탕 작전에 나섰다. 전투가 길어지자 1951년 11월에서 1952년 2월 사이에는 미군 폭격기를 동원해 국제적으로 사용이 금지된 네이팜탄(소이탄)을 투하해 백아산 일대를 불태우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빨치산은 폭격기 1대를 추락시킬 정도로 강하게 저항했으나 결국 많은 병력을 잃었다.백아산 일대에는 1953년 7월에 휴전이 성립된 이후에도 잔존 빨치산의 활동이 이어졌으나, 1954년 2~3월 백야전 사령부의 토벌 작전으로 부대장·위원장 등 남은 지휘관마저 대거 잃은 끝에 1955년 3월 섬멸된다.■낮에는 대한민국, 밤에는 인민공화국=빨치산과 교전이 치열했던 화순에서는 민간인 피해도 많았다. 낮에는 국군이 마을을 불태우거나 주민들을 ‘빨치산에게 부역했다’며 살해하고, 밤에는 빨치산에게 우익 인사의 가족이라거나 ‘협조하지 않는다’는 등 이유로 살해당했다. 당시 ‘낮에는 대한민국, 밤에는 인민공화국’이라는 말이 공공연히 돌 정도였다.이와 관련한 진실 규명은 지난 2005년 12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화위)가 출범한 뒤에야 윤곽이 드러났다.제1기 진화위 조사에 따르면 1950년 8월부터 1952년 4월까지 화순군 9개 읍·면에서 빨치산에 의해 111명이 희생된 사실이 확인됐다. 진화위는 화순에서 추가로 31명의 희생됐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도 자행됐다. 제1기 진화위는 1950년 10월부터 1951년 3월까지 화순·담양·장성·영광·함평 등지에서 291명의 주민이 국군 제11사단 20연대 1·2·3대대, 9연대 2대대에 의해 ‘빨치산’ 혹은 ‘부역자’라는 혐의로 사살되거나 연행된 후 행방불명된 사실이 확인됐다고 발표했다. 희생자 수는 화순이 사살 56명, 행방불명 5명으로 가장 많았다.진화위는 ‘견벽청야’ 작전을 수행하던 중 빨치산에게 협력했다고 의심되는 주민들을 무차별 사살해 작전 상의 위험을 제거하고 빨치산 토벌의 전과를 극대화하려는 전략을 구사해 다수의 민간인이 희생됐다고 분석했다.최근 화순 백아산에서는 6·25 전사자 유해 발굴도 이어지고 있다. 육군 제31보병사단은 지난 3~4월 화순군 백아산 일대 2000㎡에서 6·25 전사자 유해 발굴 작업을 실시했다. 앞서 31사단은 지난해 4월 화순군 백아산 일대 총 3600㎡에서 유해 발굴 작전을 벌인 끝에 6·25 전사자 유해 한 구와 탄피 등 군용품을 발굴했다./유연재 기자 yjyou@kwangju.co.kr■박동기 남녘현대사연구소장 인터뷰“늦게 오는 정의는 정의가 아니라고 하지요. 아직까지 한국전쟁 당시 피해자들의 5%밖에 밝혀지지 않았어요. 국군, 빨치산을 막론하고 국가 차원에서 피해자 진상 규명이 이뤄져야 합니다.”박동기 남녘현대사연구소장은 한국전쟁 전후 빨치산과 군·경의 충돌이 격했던 당시 피해에 대한 조사를 서둘러야 한다고 밝혔다. 박 소장은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가를 발굴하고 지리산 빨치산 등을 연구해 온 역사연구가다.박 소장은 빨치산은 결국 남·북의 정치적인 이득에 따라 파생된 단체라고 설명했다. 1948년 이승만과 한민당 등이 남한 단독 선거와 단독 정부 노선을 추진하자 이에 반발해 제주4·3사건이 발생했고, 이것이 10·19 여순사건으로 이어지면서 빨치산 활동까지 연결된다는 것이다.특히 호남 지역에서 국군과 빨치산의 전투로 인한 피해자가 많을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지정학적으로 호남은 평야 지대라 농경지가 많고, 그만큼 소작농이 많아 토지개혁을 통해 토지를 균등하게 분배하자는 공산당의 주장에 동조할 이들이 많았다는 것이다. 여기에 국군으로부터 가족이 살해당한 피해자, 빨치산의 요구에 못 이겨 입산한 사람들까지 합치면 피해자는 지금까지 밝혀진 것보다 훨씬 많을 것이라고 지적했다.하지만 빨치산의 구체적인 전투과정과 피해 상황 등을 밝힐 연구는 유독 미진했다고 설명했다. 사회에 만연한 ‘레드 트라우마’ 때문에 공산당과 관련된 역사적 연구를 하려는 사람도 없고, 그와 관련된 논문도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증언을 해 줄 피해자들은 마을 이웃들이 이유 없이 죽어가는 장면을 목도해 트라우마가 심하다는 점, 가족이 모조리 죽임을 당한 탓에 당시 상황을 설명할 이가 남아있지 않은 점 등을 꼽았다.그 날의 진상을 알릴 수 있는 방법을 몰라서 못 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고 설명했다. 특히 ‘견벽청야’ 작전에 휘말려 하루아침에 고향을 떠나 먼 곳으로 이주한 사람들은 고립된 삶을 산 탓에 피해 사실을 알릴 방법을 알 방도가 더욱 없다고 밝혔다.박 소장에 따르면 당시 민간인 학살의 주축은 아이러니하게도 ‘국군’이었다. 대략 국군이 20명을 살해하면 빨치산에 의해서는 1명이 살해당했다는 것이다. 국군이 수적으로 압도적일뿐 아니라 작전지역 일대 마을을 모조리 불태우는 작전을 썼고, 좌익 부역자 색출 등을 명분으로 적법한 절차 없이 비무장·무저항 상태의 민간인을 집단살해했다는 진술이 잇따르고 있기도 하다.
반공vs친공 갈등 휩싸인 중공군 포로 2만명 제주서 '분리작전'
2만 중공군 포로는 제주도에 왜 왔을까?3년1개월(1129일) 동안 벌어진 6·25전쟁에서 중공군 포로는 약 2만1,700명으로, 미군 4,439명보다 5배나 많았다.전쟁이 한창일 당시 포로수용소는 육지와 떨어진 섬인 제주도가 후보지였다. 1950년 말 중공군의 공세로 서울을 다시 빼앗기자, 제주도의 포로수용소 설치는 유력해졌다. 다만, 리지웨이 미8군사령관은 제주도가 피난민으로 초만원이 된 점, 이 섬은 임시정부가 들어설 최후의 보루로 여기면서 부정적 입장을 보였다. 결국, 육지와 비교적 거리가 가깝고 물 공급이 가능한 거제도가 포로수용소로 낙점됐다.휴전 협상이 진행되고 전쟁이 끝날 조짐이 보이자 생포되거나 항복한 포로 송환은 쟁점이 됐다. 포로수용소는 냉전과 이념 대결의 축소판으로 또 다른 전쟁터였다. 2만명에 달했던 중공군 포로들은 반공(反共)과 친공(親共)으로 대립했고, 서로를 죽이고 학대하는 유혈 충돌이 끊이지 않았다.폭동과 유혈 사태가 끊이지 않자, 유엔군사령부는 1952년 2월 ‘분리 작전’에 돌입했다. 그해 7월까지 약 2만 명에 이르는 중공군 포로를 거제도에서 제주도로 보냈다.당시 중화민국(대만)으로 가길 원했던 반공포로 1만4,000여 명은 서귀포시 대정읍 모슬포지역에, 중화인민공화국(중국)으로 송환을 원했던 친공포로 5,900여 명은 제주비행장(현 제주국제공항) 부지에 수용됐다.친공포로들은 1952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3주년을 맞아 시위를 벌였다. 미군 2개 소대가 진입하는 과정에서 포로 45명이 사망하고, 120명은 부상을 당했다.유엔군사령부는 “폭동(시위)은 집단 탈주를 위해 시작됐으며, 포로들은 탈옥 후 한라산 빨치산과 합류할 계획을 세웠다”고 발표했다. 이 사건 이후 경비를 맡은 미군과 친공포로의 갈등은 심화됐으며, 포로수용소 주변에 살았던 주민들은 불안에 떨어야했다.반공포로가 수용된 모슬포지역에서는 유혈 사태가 일어났다는 기록은 없지만, 주민들은 ‘사제 수류탄 폭발 ’, ‘포로끼리 패싸움 후 시체 유기 사건’ 등을 언급, 추가 조사가 필요한 상황이다.당시 모슬포에는 육군 제1훈련소(1951~1956년)가 설치됐고, 한국군도 포로수용소 경비 업무를 맡았다. 지붕으로 얹은 양철판 밑에 기름을 먹인 종이(루핑)를 바른 수용소 환경은 열악했다.“포로수용소 건물은 나지막하고 검은 루핑 지붕이어서 여름철에는 실내 열기가 대단했다. 나무판자로 물방아와 비슷한 선풍기를 만들어 포로들이 줄을 교대로 당기며 바람을 만들었던 것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미군부대를 출입했던 이발사 서병수씨가 당시 수용소의 열악한 사정을 증언한 내용이다.중공군 포로들은 채소밭을 일궜고, 미군의 감시 아래 수용소 인근 송악산에 오르거나 바닷가에서 미역을 채취하기도 했다.설리반(sullivan) 군종신부는 이들을 교화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포로들은 늪지를 매립하고 돌을 나르며 모슬포성당 건립 공사에 투입됐다. 성당은 ‘통회의 집’으로 불렸다. 포로들이 한국에 많은 피해를 입힌 죄를 뉘우치며 지은 집이라는 뜻을 담았다. 나중에는 사랑으로 포로들을 용서하자는 의미로 ‘사랑의 집’으로 변경됐다.1953년 6월 8일 전쟁포로 송환 협의가 이뤄졌고, 7월 27일 정전 협정이 체결됐다.국공내전에서 마오쩌둥에 패해 대만으로 쫓겨 간 장제스 국민당 정부는 정전 협정 체결 전인 1953년 초부터 반공포로와 교섭하며 이들의 대만 송환을 준비했다.1953년 7월 29일 대만 정부는 제주에 있는 반공포로들에게 출판물 및 영상물 제공과 함께 위문단 파견을 한국 정부에 요청했다. 중공군 포로의 대만 행은 국민당 정부가 내전에는 졌지만, 이데올로기에서는 승리했다고 선전할 수 있는 기회였다.한 달 뒤인 8월 28일 대만 정부가 파견한 위문단이 제주도에 도착했다. 대만 공군은 수송기 8대를 동원, 37톤의 위문품을 전달했다. 당시 대만 언론에 소개된 위문품은 1인 당 설탕 1홉, 소고기·채소 통조림 1개, 파인애플, 바나나 2개, 러닝셔츠 1벌이었다.1년 남짓 제주도에 수용된 1만4,000여 명의 반공포로들은 대륙 행을 거부하며 팔뚝에 ‘반공(反共)’이나 ‘살주발모(殺朱拔毛)’ 같은 문신을 새겼다. 홍군 총사령관 주더(朱德)를 죽여 버리고 마오쩌둥(毛澤東)을 없애겠다는 뜻이다.반공포로 1만4,000여 명은 제주도를 떠나 1954년 1월 20일 인천항에서 미군 수송선에 올랐다. 1월 23일 대만 지룽항에 도착한 이들은 반공의사(反共義士)로 대접받았다.제주비행장에 수용됐던 친공포로 5,000여 명도 선박과 육로를 통해 1953년 8월부터 9월까지 본국으로 돌아갔다. 제주일보=좌동철 기자■ 김웅철 향토사학자 인터뷰“70년 전 중공군 포로 2만명이 1년 넘게 제주도에 수용된 것은 전쟁사나 외교사에 중대한 사건이다. 제주 섬에서 벌어진 반공포로와 친공포로의 갈등은 국민당과 공산당의 대립이자, 이념 갈등이었다.”역사사진 자료집 ‘강병대(육군 제1훈련소) 그리고 모슬포’를 발간한 김웅철 향토사학자(73)는 반공포로들이 도열, 이국땅에서 숨진 동료의 시신에 청천백일기를 덮고 장례를 치르는 장면이 담긴 귀중한 사진을 갖고 있다.김씨는 “중공군들은 모슬포~사계리 도로 개설과 모슬포성당 기초 공사에 동원됐고, 일부는 아일랜드 출신 설리반 군종신부로부터 세례를 받았다”며 “채소를 즐겨먹으면서 농장대를 조직, 수용소 인근 밭에서 채소를 직접 재배했다”며 당시 생활상을 소개했다.이어 “포로들은 또 ‘자치대’를 조직, 북을 치고 나팔을 불며 군대식 열병을 했고, 양철 조각으로 만든 피리를 불며 애환을 달랬다”며 밝혔다.김씨는 “반공포로는 모슬포지역 3곳에, 친공포로는 현 제주공항 화물청사 인근 1곳에 설치됐는데 수용소 건립으로 민가가 철거되고 토지가 강제 징발되면서 마을주민들이 적잖은 피해를 봤다”고 했다.대정읍 상모리에는 중공군 포로수용소 건물 외벽이 남아 있다. 길이 20m, 높이 2m의 석축 벽에는 창틀 모양을 지금도 간직하고 있다.김씨는 “냉전시대, 제주에 수용된 중공군 포로 70%가 대만 행을 선택한 것은 국제사회에 큰 이슈였지만, 지금은 수용소 터와 건물이 마늘밭(사유지)에 남아있고, 70년 넘게 방치된 것은 안타까운 일”이라며 “수용소 터를 매입하고 복원해 전쟁의 참상과 역사의 교훈을 후대에 알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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