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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머신 여행 '라떼는 말이야']첫발 뗀 민주주의 투표율 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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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의원 선거의 역사

◇제10대 국회의원선거 투표 행렬.

1945년 8월15일 광복에 이어 9월8일부터 미군정이 시작된다. 1948년 8월15일까지 이어지는 미군정 기간 중에 초대(제헌)국회를 구성하기 위한 선거가 1948년 5월10일에 진행되는데 이것이 바로 대한민국 최초의 국회의원 선거다. 국회의원 전체를 한꺼번에 선출하는 선거라고 해서 당시에는 ‘총선거(總選擧)’라고 불렀다. 우리가 현재까지 관용적으로 쓰는 총선(總選)이라는 표현도 여기서 나온 것이다. 이 선거는 미소공동위원회가 1947년 8월12일 완전 결렬된 이후에 치러진 것으로, 남한과 북한 전체를 아우르는 독립적이고 민주적인 통합정부 구성의 노력은 사실상 무산되고 만다. ‘5·10총선거’는 그 해 1948년 3월30일부터 시작된 선거기간만 무려 42일에 달했다. 현재의 14일에 비하면 3배에 해당하는 기간이지만 이 것도 역대 세번째 기록(제2대 49일·제3대 44일)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이 선거를 통해 198명(제주도 선거구 제외)의 국회의원이 뽑혔는데 제헌국회에 입성한 정당 수는 대한독립촉성국민회(55명)와 한국민주당(29명)을 비롯해 무려 16개에 달했다. 그도 그럴것이 이 선거에만 48개 정당과 사회단체가 후보를 냈고, 1인 후보자로 구성된 곳도 26개나 됐기 때문에 확실한(?) 다당제를 실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선거를 통해 무소속은 85명(417명 입후보)이 당선됐다. ‘투표할 수 있는 사람은 다 했다’고 할 수 있을 정도인 95.5%로 역대 최고의 투표율을 기록했고, 제3대 국회의원선거까지 90%대(제2대 91.9%·제3대 91.1%)를 유지했다. 임기는 역대 가장 짧은 2년(1948~1950년)이었지만 이들의 임무는 대한민국 역사에서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1985년 2월12일 실시된 제12대 총선 춘천시 중앙동의 투표소 모습.

그해 5월31일 제헌의회가 개원된 이후, 7월1일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했고, 7월17일 제헌헌법을 공포하기에 이른다.

우리나라의 국회의원 선거역사에서 무소속이 가장 많이 선출된 때는 6.25 전쟁 바로 직전에 열린 제2대(1950년) 총선으로 126명(득표율 62.9%)이 선출됐다. 제21대(2020년) 총선에서 역대 가장 적은 5명의 무소속 국회의원이 당선된 바 있지만 아예 ‘0’명인 때도 있었다. 1963년 최초로 지역구와 전국구(비례대표)로 나눠서 진행된 제6대 총선 때는 입후보제를 정당추천제로 바꾸면서 무소속 입후보를 원천적으로 차단했다. 이처럼 무소속을 없애버리는 조치는 제8대(1971년) 총선까지 유지됐다. 하지만 이는 제9대 총선 때의 기형적인 국회의원 선출 방식에 비하면 ‘새발의 피’ 수준이었다. 1972년 10월 박정희 대통령은 정치체제 개혁을 선언하면서, 국가긴급권을 발동, 국회를 해산하고 일체의 정치활동을 금지시키는 동시에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한다. 이어 국민투표를 통한 유신헌법을 확정하면서 이듬해인 1973년 2월 제9대 총선을 실시한다. 선거방식은 선거구별로 2명을 선출하는 중선거구제 시행과 함께 국회의원 정수 3분의 1을 대통령의 제청에 따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간접 선출하는 방식을 선택하면서 민주공화당이 항상 과반을 넘을 넘도록 만들어버린다.

◇12대 총선에서 고령의 유권자가 가족의 등에 엎여 투표를 하고 있다.

이 제도는 제10대(1978년) 총선까지 적용됐다가, 사라진다. 선거일이 정해진 것은 제15대(1996년) 총선부터다. 공직선거법 규정(34조)에 따라 국회의원의 임기 만료일인 5월29일의 50일 전인 4월9일 이후의 첫 번째 목요일(15~17대)과 수요일(18대부터)에 선거를 치르도록 한 것이다. 제22대 총선 선거일이 4월10일 수요일로 결정된 이유다. 역대 국회의원 선거 가운데 가장 투표율이 낮았던 때는 18대(2008년) 때로 처음으로 50%가 붕괴되면서 최종 46.1%를 기록했다. 역대 국회의원 선거 중 당락을 가른 가장 적은 표차는 단 3표였다. 제16대 총선 경기도 광주군, 서울 동대문구 을 선거구에서 벌어진 일로 재검표를 거쳐서 확정됐으니 그 과정을 함께 지켜 본 당선자, 낙선자, 운동원 할 것 없이 모두 애를 태울 수 밖에 없었다. 최고 득표율 당선자는 제13대 총선 광주시 북구에서 출마한 정웅(평화민주당) 후보의 91.45%이고, 최저 득표율 당선자는 제2대 총선 충북 제6선거구(영동군)에 출마한 성득환(민주국민당) 후보로 단 10.82% 표를 얻고 국회의원 배지를 받기도 했다.

◇1948년 5·10 총선거 포스터, '투표는 애국민의 의무, 기권은 국민의 수치'라고 적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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