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일반

[김도연의 포구에서 쓰는 편지]푸른물결 파도소리 반기는 내 청춘의 힐링 공간 오늘 그 바다에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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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삼척 장호항

사월 오후의 포구는 한산했어.

대관령을 지날 때만 해도 높은 산들에 아직 녹지 않은 눈이 쌓여 있어서 봄 포구의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있을까 걱정이 앞섰는데 고갯길을 내려와 동해고속도로로 접어들자 풍경이 조금씩 달라졌지. 아직 봄꽃들이 만발하진 않았지만 양지 바른 곳에서 드문드문 피어 있는 꽃들이 보이자 마음은 조금씩 부풀어 올랐지. 바로 장호항(藏湖港)으로 달려갈까 하는 마음을 바꿔 7번 국도로 길을 바꾼 건 맹방해수욕장 근처의 벚꽃길과 유채꽃이 보고 싶어서였어. 벚나무는 꽃망울이 붉게 물들어 있었고 유채꽃은 초록과 노랑 물감을 반쯤 섞었더라. 동해안의 저온현상이 그 원인이라고 하는데 어쨌든 나름 괜찮은 풍경이었어. 벚꽃이 피기 직전의 그 붉음은 만개한 꽃보다 더 마음을 두근거리게 만드는 힘이 숨어 있거든. 그렇게 나는 집을 떠난 지 한 시간 반 만에 도착했지. 너도 알겠지만 정말 오랜만에 장호항을 찾아온 거야.

한눈에 보아도 많이 변했더라. 바다에서 바람이 불어오고 갈매기가 자그마한 포구를 끼룩거리며 날아다녔지. 포구의 하늘엔 붉은 케이블카가 천천히 떠다니고. 나는 금세 봉두난발이 된 머리를 쓰다듬으며 포구를 걷기 시작했지.

우리가 처음 장호항을 방문한 게 언제였는지 도무지 기억나지 않았어. 아마 이십대 후반일 거라 짐작되는데 정확히는 모르겠어. 강릉에서 시외버스를 타고 왔던 것은 확실해. 돌아갈 때도 장호항 입구의 버스정류장에 앉아 하염없이 버스를 기다렸던 장면이 떠오르거든. 그때 우리는 누구랑 함께 왔을까…… 어떻게 장호항을 알게 되었을까. 와서 무엇을 했을까. 포구에 정박해 있는 어선들을 구경하고, 바람이 요동치는 방파제를 걷고, 포구 끝 파도에 아랫도리를 연신 적시는 기암괴석들을 구경하였겠지. 주머니 사정이 변변찮았던 시절이었을 테니 횟집엔 들어가지 못하고 방파제에 둘러앉아 새우깡이나 쥐포를 안주로 소주를 마셨을 거야, 아마도. 활처럼 둥근 난바다의 수평선과 마치 말들이 갈기를 날리며 바다 위로 달려가는 듯한 기이한 형태의 바위들을 바라보며. 그리고 방파제와 바위를 때리는 파도소리에 한숨을 풀어놓았겠지. 우리는 우리의 풀리지 않는 오늘과 보이지 않는 미래에 대해 늘 초조하고 불안해했던 것 같아. 그런 시절이었지. 넌 결국 급하게 마신 술로 인해 테트라포드에 쪼그려 앉아 울며 토했던가. 아니 그게 나였던가.

삼십여 년이란 세월이 흘렀구나. 그동안 우리는 꽤 여러 번 장호항을 찾아왔지. 버스를 이용한 것은 처음이 마지막이 되었고 이후론 누군가의 자가용에 실려서 찾아왔었지. 주머니 사정이 좋은 누군가가 회를 주문하면 시시덕거리며 술잔을 비웠겠지. 아, 물론 너도 가끔 지갑을 열기도 했었지. 이십대를 건너온 우리는 세상에 대해 조금씩 자신감과 오기가 생기기도 했었을 테니까. 그 호기로움을 장호 앞바다를 달려가는 돌로 된 말들 앞에서 보여주고 싶기도 했을 거야. 충분히 이해해. 나도 그러고 싶었거든. 바다는 그런 곳이기도 하니까 말이야. 지금은 기억도 희미하지만 당시 우리 인생의 장호 바다는 해무가 낀 것처럼 가시거리가 워낙 희미했으니까.

어느 시점부터 우리들의 장호항 방문이 어떤 절실함은 사라지고 그냥 바람을 쐬려 가는 곳으로 변한 것을 너도 알고 있겠지. 더 괜찮은 횟집을 찾아 부두를 기웃거리고 섬과 기암괴석들, 파도를 찍느라 수선스러워졌지. 아니면 일행에게 이렇게 아름다운 항구와 바다를 알고 있다고 자랑을 늘어놓느라 바빴지. 강원도의 끝인 삼척까지 차를 끌고 내려온 것에 대한 뿌듯함도 감추지 않았지. 또 어느 낮과 밤엔 낚싯대를 들고 찾아와 흰 등대와 빨간 등대가 서 있는 방파제 끝이나 잠든 어선들 사이에서 물고기를 낚아 올리느라 손에서 비린내가 가시지 않았지. 하지만 우린 그런 변함에 대해 서로 내색하진 않았지. 세상 사람들이 다 그런 거 아니냐며 스스로를 위안했지.

물론 장호항도 더 이상 옛날 그대로의 모습은 아니었어. 해가 다르게 변화를 거듭해서 방문할 때마다 놀라곤 했으니까. 포구가 변했다기보다는 포구를 둘러싼 주변 건물들의 변화가 놀라웠지. 우린 흰 등대 옆에서 그 장관을 구경하다가 나무들이 우거진 산비탈 중간쯤에 터를 잡은, 빨간 지붕을 얹은 구옥 한 채를 찾아내곤 탄성을 질렀지. 포구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그 집의 가격은 얼마일까 의논하다가 왠지 머쓱해져서 논의를 닫았지. 가장 큰 변화는 장호항과 인근 용화항을 오가는 해상케이블카가 대표적인 걸 거야. 케이블카를 타고 포구를 내려다보면 어떤 기분일까. 포구 뒤편 성황당이 있는 산 위에 자리한 장호역(케이블카를 타는 역) 앞에서 너는 탈까 말까를 망설이더라. 나도 당연히 망설였지만 다음 기회를 기약하고 마음을 접고 말았지. 너는 왜 마음을 접었니? 나는 그런 내 마음을 잘 모르겠더라.

다시 장호항으로 내려온 우리는 어촌계에서 운영하는 단골식당에서 늦은 점심으로 회덮밥을 주문했지. 야채와 고소한 콩가루가 들어간 잡어 회에 초장을 조금 더 넣어 비빈 뒤 따스한 밥을 섞어 먹었지. 나는 네 얼굴에서 맛을 알 수 있었지. 목이 막히면 돌미역국을 수저로 떠먹었지. 낚싯배들이 바람에 흔들렸고 저편 빨간 등대 아래에선 젊은 친구들이 낚시를 하고 있었어. 배 위에 앉아 날개를 접고 있던 갈매기들은 가끔 생각났다는 듯이 한두 마리 허공으로 날아올랐고. 그 사이 우리는 반찬 한 점 남기지 않고 모두 비웠지. 그 옛날 청춘의 절망은 까맣게 잊어버린 사람들처럼.

장호항은 여전히 한산했지. 고깃배들은 밤에 일을 나가고 아침에 돌아와 낮에는 쉬기 때문일까. 어부들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어. 왕복 케이블카를 탑승한 뒤 포구로 내려온 관광객 한 무리가 지나간 게 전부였지. 아직 꽃이 피지 않은 포구의 절벽 아래를 한 바퀴 더 돌고 우리는 장호항을 나섰어. 차를 끌고 장호 바로 아래의 갈남항, 장호버스정류장을 지나 고개 너머 용화항, 황영조기념관이 있는 초곡항, 공양왕릉을 지나면 만날 수 있는 궁촌항, 길이 험한 대진항, 이런 자그마한 포구들을 지나 마침내 걸어서만 갈 수 있는 부남 해변에 도착했지. 영화 <헤어질 결심>의 마지막 장면에 잠시 등장하는 곳이야. 작은 백사장 너머 바위들 사이에서 피어나는 파도 소리가 요란한 해변이었지. 그 소리를 오래 듣다가 대나무가 우거진 좁은 계단을 오를 때 나는 뒤따라오는 네게 고개를 돌리지 않고 말했지.

“그동안 고마웠어. 그런데…… 너는 누구니?”

대답이 없어 고개를 돌리니 너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바다의 소리만 대숲을 흔들고 있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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