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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칼럼]폐사지에서 깨우친 섭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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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혁진 강원한문고전연구소장

옛 문헌을 뒤적이다 보면 절을 노래한 시를 만나게 된다. 무슨 뜻일까. 번역해 보면 문득 절에 가고 싶어진다. 행방이 묘연한 절은 더 흥미롭다. 우여곡절 끝에 절터를 찾으면 잡초가 우거진 경우가 대부분이다. 한쪽 구석에서 기와 파편이 나뒹굴고 있다. 간혹 부도를 만나기도 한다. 빈터에 탑이 홀로 서 있기도 하다. 정시한(1625~1707)이 오대산 북대에서 동쪽으로 6~7리를 가서 도착한 암자는 함허당이었다. 깊숙한 곳에 스님 혼자 수도하다가 저녁 식사를 대접하였다. 솔잎 반찬뿐이었다. 길이 험하여 월정사의 노스님도 암자를 보지 못하였고, 어떤 스님은 영지를 캐러 갔다가 보았다고 말할 정도였다. 정시한의 글을 들고 신선골로 들어섰다. 몇 시간을 걸어 폭포를 넘고서도 난관은 이어진다. 포기하려고 할 때 암자터가 나온다. 김창흡(1653~1722)은 오대산의 미덕으로 곳곳에서 수행하기 좋은 점을 들면서 금강산에 버금간다고 평하였다. 함허당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적조암, 자씨암, 종봉암 등 암자터를 답사하면서 오대산은 불국토임을 재확인하였다. 정선의 자장율사 순례길을 따라가면 적조암 삼거리가 나온다. 이어지는 능선은 샘터 사거리까지 연결된다. 함백산 정상에서 바라보는 북서쪽의 전망은 눈을 시원하게 한다. 북쪽으로 심적암을 찾아 나섰다. 우여곡절 끝에 조그만 능선을 넘으니 암자 지붕이 반긴다. 햇볕이 잘 드는 뜨락에 축대가 보인다. 건물이 몇 채 더 있었을 것이다. 바위가 호위하는 언덕에 보이는 정자는 하늘 아래 있는 듯하다. 쉼 없이 솟는 샘물은 깨달음을 줄 것같이 시원하다. 김신겸(1693~1738)은 「심적암」이란 시에서 “중함백에 그윽이 암자 지으니, 아스라이 속세와 떨어졌네”라고 읊조렸다. 양구읍을 지나 해안으로 향하니 표지판이 제4땅굴과 을지전망대를 가리킨다. 길은 ‘금강산로’에서 ‘펀치볼로’로 바뀐다. 분단된 이래 외지인의 방문이 쉽지 않았던 펀치볼로는 돌산령을 넘어 해안으로 연결된다. 고개를 넘기 전 팔랑리에 59칸의 규모였던 심곡사가 있었다. 유구한 역사를 가진 절도 한국전쟁을 피하지 못하였다. 도솔산과 대암산 사이의 절골은 손때가 하나도 묻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준다. 번창했던 절은 기와 파편과 축대만 남았다. 영월군 흥월리에 가면 궁예가 마셨다는 세달샘터가 있다. 마을 입구에 굴피나무 껍질로 지붕을 이은 샘터는 흥교사터와 연결된다. 궁예는 세달사로 가서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스스로 선종이라고 불렀다. 『삼국사기』에 궁예가 세달사로 갔는데 지금의 흥교사가 있는 곳이라는 기록이 보인다. 절터로 향할 때만 해도 반신반의했다. 절이 궁벽한 산속에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고개를 넘자마자 펼쳐진 산세를 보며 탄성을 질렀다. 남쪽을 바라보며 궁예가 혁명을 꿈꾸던 곳이 흥교사였다. 문헌을 따라 답사를 하다 보면 절이 없는 곳이 없다. 지금까지 불법을 전하는 절도 있지만, 폐사지가 된 채로 방치된 곳도 많다. 우리의 기억에 사라졌지만, 축대와 부도와 선인들의 시문을 만날 때마다 가슴이 뛴다. 목탁 소리도, 건물도 사라진 절터는 적막하기만 하다. 탐진치(貪瞋癡·욕심과 노여움과 어리석음)마저 허망하게 느껴지는 공간이다. 장엄했던 시간을 뒤로 한 채 자연으로 돌아가는 폐사지는 자연의 섭리를 깨우치는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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