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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머신 여행 '라떼는 말이야']지·덕·노·체 겸비 인재 키운 '새마을운동 청소년 버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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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H 운동의 기억

◇1977년 춘천고 운동장에서 열린 ‘제23회 4H 경진대회’ 모습. 사진=강원일보 DB

‘4-H 운동’을 아시나요. 시골마을 어귀에서 어렵지 않게 만났던 녹색 네잎 클로버 바탕에 흰색으로 ‘지·덕·노·체’를 새겨넣은 표지석이 떠오르는 ‘4-H 운동’은 우리나라의 근대화 과정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사회운동 가운데 하나다. ‘새마을운동’의 한 갈래 쯤으로 이해하는 경우도 많은데, 4-H 운동이 1945년 이후 미군정기에 진행된 것을 감안하면 새마을운동의 20여년 쯤 선배라고 할 수 있다. 새마을운동이 박정희 정부가 주도적으로 진행한 지역사회개발 운동이라면 4-H 운동의 뿌리는 1900년대 초 미국에서 청소년을 대상으로 시작된 농촌계몽운동이라고 하겠다. 농촌지역의 생활개선 보다는 문맹퇴치 등 교육에 방점을 찍은 일제강점기의 브나로드 운동과도 결을 달리한다. 여기서 4-H는 명석한 머리(Head) · 충성스러운 마음(Heart) · 부지런한 손(Hand) · 건강한 몸(Health)을 의미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를 ‘지(智)·덕(德)·노(勞)·체(體)’로 번역해 사용하고 있다.

◇1971년 개최된 제17회 강원도 4-H 구락부 경진대회 모습. 사진=강원일보 DB

4-H 운동은 1947년 국내에 처음으로 도입된다. 당시 구자옥 경기도지사와 경기도 군정관으로 활동한 찰스 앤더슨(Charles A. Anderson) 중령이 도입, 경기도 일원 에 ‘농촌청소년구락부’를 결성한 것이 그 시초다. 점차 전국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한 이 운동은 효과를 나타내기 시작한다. 농촌지역에서의 생산력 확대를 4-H 운동의 효과로 꼽은 것이다. 다음은 1949년 신문 내용. “경상도의 4-H 구락부(농촌청년구락부) 아동들은 동구락부 운동을 통해 습득한 지식으로 삼백십마리의 닭에서 매일 평균 이백이십개의 계란을 낳게하고 있다하며 한국에 있어서 4-H 구락부운동의 성과를 발휘하기 시작했다고 한다.(동아일보 1949년 6월6일자 보도)” 6·25 전쟁이 발발하면서 중단의 위기를 맞기도 하지만, 전쟁이 채 끝나기도 전인 1952년 12월 정부가 4-H운동을 국가시책사업으로 채택하면서 전국적으로 확대되는 계기를 맞게 된다. 일제강점기 직후 그리고 전후라는 위기의 순간에 ‘재건’의 기치를 내세운 이 운동은 당시에는 위정자들 입장에서는 반길만한 요소들을 거의 다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1953년 11월 민간추진단체인 ‘한국4-H구락부중앙위원회(현 한국4-H본부)’가 결성되고 4-H중앙경진대회를 개최하기에 이른다.

◇1970년 춘천시청에서 진행된 ‘제16회 강원도 4-H 구락부 경진대회’ 모습. 사진=강원일보 DB

◇1976에 실시된 ‘제22회 강원도 4-H 구락부 경진대회’ 모습.

정부의 정책 수립과 한미재단(민간차원의 원조를 위해 설립된 비영리 기관) 등에서의 후원 등으로 4-H운동은 전후 복구, 농촌재건운동과 연계되며 탄탄하게 자리매김하게 된다. 이 시기 각 시·군에도 농촌청년구락부(구락부는 클럽의 일본식 음역어다)가 속속 생겨난다. 4-H 운동이 지닌 실천적인 방향성은 당시 우리 사회가 직면한 어려움을 타계하기 위한 대책 등과 어우러져 제대로 된 화학작용을 일으키면서 발전을 거듭한다. 당시 4-H 구락부 회원의 서약 내용을 보면 이 운동에 참여한 젊은이들이 얼마나 큰 사명감을 갖고 활동에 임했는지를 알 수 있다. “나는 더욱 명석한 생각, 더욱 충성된 마음, 더욱 봉시적인 손, 더욱 잘 살기 위한 건강으로 나의 클럽, 나의 동리, 나의 조국에 헌신하기로 맹세한다.( 경향신문 1955년 6월 2일자 보도)”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는 농촌진흥청의 발족(1962년 )이 4-H 운동의 기반을 다지고 확대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특히 회원의 연령이 10~20세에서 13~24세로 변경되는 한편 전국 대학에도 조직이 만들어지고 4-H신문 발행, 4-H운동발전연찬회 개최, 전국4-H지도자야영대회 등 등 다양한 활동이 봇물처럼 터져나온다.

◇1977년 춘천시 중앙로 1가에서 진행된 ‘제23회 강원도 4-H 경진대회’ 시가행진 모습. 사진=강원일보 DB

1970년에 이르러서는 새마을운동과 함께 짝을 이뤄 농·어촌의 중심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새마을운동을 주창한 박정희 대통령이 1972년 4H 경진대회에서 한 발언을 보면 당시 4-H 운동에 대해 그가 갖고 있는 신뢰가 어땠는지를 알 수 있다. “과거의 농촌운동이 몇 번이고 일어나다 흐지부지된 것은 그 운동방향이 잘못 설정됐기 때문이다.(매일경제 1972년 4월 5일자 보도)” 새마을운동의 전신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 전국적인 기반을 다지는데 공을 세운 4-H 운동은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한국4-H중앙연합회가 창립(1981년)되고 새마을운동중앙본부 회원단체로 가입되면서 조직관리도 새마을운동중앙본 부로 이관되며 활동 반경이 축소된다. 명칭도 ‘4-H구락부’에서 ‘새마을청소년회’로 바뀐다. 이처럼 새마을운동 안에 흡수되는 듯 했던 4-H 운동은 1988년에 ‘4-H회’라는 이름을 되찾으면서 활동 방향에 변화를 꾀하게 된다. 급격한 산업화로 인해 농촌사회의 모습도 탈바꿈 하면서 4-H 운동은 새로운 사회상을 반영해 지역사회 청소년교육운동으로 전환된다. 2000년대에 접어들면서 회원 연령도 9~29세로 상향하고, 비전도 ‘창의·융합적 미래인재 육성으로 지속 가능한 사회실현’으로 변경하며 현재도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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