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발언대]유월, ‘티모테오 순례길’을 걷다

이복수 박사
전 강원수필문학회장

오후 2시, 삽존리 산방을 나선다. 늙은 아내의 배웅을 받으며 군도를 따라 우암리를 향해 걷다가 오상영성원 표지판 앞에서 왼쪽 나지막한 언덕길을 오른다. 싱그러운 산바람이 얼굴을 스치는 오월, 2.1㎞ 소나무 숲속 임도길 아래 작은 ‘예수 그리스도 고난 수도회’가 나를 맞는다. 오상영성원이다. 호젓한 산길은 적막 속에 갇히고 사각사각 자갈과 솔잎을 밟는 길손의 발자국 소리만이 정적을 깨뜨린다. 마지막 가파른 길을 오르면 거기 발아래 구불구불 어성천을 따라 남대천 수리마을로 흐르는 강물이 보인다. 그리고 내려가는 길-바로 부소치재다. 부소치 사거리에서 잠시 숨을 고른 채 표지판을 응시한다. 거기 ‘티모테오 순례길’(38선 도보순례) 글씨가 눈에 들어온다.

‘티모테오’는 양양 손양면 부소치재에 있는 고(故) 이광재 신부의 순례길 이름이다. 내가 그를 만난 것은 지난해 봄이었다. 아내는 고향 가까운 양양에 귀촌하고 싶어 했다. 그리하여 수소문 끝에 정착한 곳이 삽존리 산방이었다. 굳이 고향 인근 양양을 택한 것은, 20대 젊은 시절 양양에서 공직을 시작하면서 아내와 결혼해 두 자녀가 태어난 곳이기도 해 전혀 낯설지 않았고 무엇보다도 남대천과 바다가 지척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곳에 정착한 지난 가을날 오후, 나는 정말 우연히 법수치리와 어성전 명주사를 찾았다가 내려오는 길에 부소치 네거리에서 문제의 표지판과 마주친 것이다. 티모테오 순례길, 아아... 그리고 육이오, 나는 그 이튿날 바로 순례길 탐방에 나섰다.

티모테오 순례길은 슬픈 역사의 아픔이 서려 있는 곳이었다. 해방둥이인 나는 38선 바로 이북지역인 양양읍 속초리에서 태어났다. 당시 양양성당의 주임이었던 티모테오 신부는 자유를 찾아 남하하는 사도들과 주민들이 무사히 38선을 넘도록 피난을 돕고 있었다. 그러다가 1950년 6월24일 6·25전쟁 하루 전에 인민군에게 붙잡혀 원산교도소로 갔고 다시 원산 와우동 방공호 속에서 인민군들에게 사살되고 만다. 마지막 숨을 거두면서도 “살려 달라!”는 수용자들의 외침에 “제가 도와드리겠어요...”라고 중얼거리며 숨져갔다.

티모테오 순례길은 이렇게 마지막 숨을 거두는 순간에도 고귀한 모습을 보였던 이광재 사제의 넋과 순교의 정신을 기리는 뜻에서 명명된 순례길이다.나는 매일 이 길을 걸으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내 안의 자성(自性)을 찾는 시간을 갖는다. 그리하여 나는 아내의 작은 산방에서 ‘맑은 가난’과 자유로운 영혼을 찾아가는 산방일기를 쓰기로 마음 먹는다. 무소유의 삶-그것은 소유하지 않는 게 아니라 욕심을 비워내고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 하심(下心)일 것이다. 오늘도 나는 티모테오 순례길을 걸으며 생각한다. 이 소나무 숲길에서 내 안의 온갖 탐욕을 버리고 나무들과 산새들의 소리를 들으며, 구름과 바람을 벗하며 오롯이 비워내는 삶을 살아가야겠다고 다짐한다. 그 길에서 만나는 작은 예수님과 명주사 부처님 그리고 노자와 장자의 무위자연을 깨우치며 ‘무소의 뿔’처럼 그렇게 혼자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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