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민 대부분 흥선대원군 시절 박해 피해 이주한 천주교 신자 후손
지난 20여년간 친환경농업 실천… 사라졌던 미꾸라지도 돌아와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일라∼
북원주 나들목에서 빠져 나와 원주시 호저면 고산리 방면으로 5분여를 달리다 보면 오른편으로 광격리 ‘영산마을’을 알려주는 이정표를 만날 수 있다.
이정표가 없다면 안쪽에 마을이 있는지 가늠조차 어렵다.
야트막한 산들을 밀어낸 뒤에야 둥지처럼 포근한 마을을 만날 수 있다.
마을을 둘러싼 부드러운 호암산 아래 따스한 햇살이 가득한 영산(靈山)마을.
영산마을의 유래는 정확하지 않다.
신령 영(靈)자를 쓰는 독특한 마을이지만 그에 대한 유래를 정확하게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는 마을이 형성된 배경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20여 가구가 옹기종기 모여살고 있는 영산은 천주교의 마을로 주민들 90% 이상이 천주교 신자이다.
주민들 대부분은 흥선대원군 시절 박해를 피해 이주한 천주교 신자들의 후손이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농촌마을과 달리 집성촌(集姓村)이 아닌 각기 성(姓)이 다른 각성바지의 신자들끼리 모여 살고 있는 교우촌인 것이다.
마을은 100여년의 세월을 지켜 온 영산준본당을 중심으로 좌우로 나뉘어져 있다.
영산마을의 중심은 영산 공소(公所), 지금의 천주교원주교구 영산준본당이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1901년 고산리 곤의골에 있던 분이 영산마을로 이사를 와 신앙생활을 시작한 것이 시초가 됐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후 1904년 공소로 설정되면서 횡성 풍수원 성당에 계시던 전규하 신부님이 초가집을 지어 종교생활을 시작하게 됐다.
지금의 영산준본당은 6·25전쟁 때 건물이 소실돼 새로 지은 건물이다.
천주교 마을답게 신부도 4명씩이나 나왔다.
마을규모로 봤을 때 상당히 많은 숫자다.
지금은 좀 다르지만 예전에는 정승보다 더 어려운 것이 바로 신부가 되는 것이라고 말했을 정도다.
1930년 사제서품을 받은 이보경 신부를 시작으로 이학근 신부와 이흥근 신부, 여진천 신부 등 4명의 신부를 배출했다.
영산마을은 1990년대 호저생협(지금의 원주생협)이 생기면서 본격적인 친환경농업 실천 마을로 전국에 알려져 있다.1975년 영산공소 신자들을 중심으로 가톨릭농민회 영산분회를 조직해 공동체를 운영하면서 시작한 생명농업이 그 시발점이다.
지금은 36만3,638m²의 논과 9만9,004m²의 밭, 6만6,116m²의 과수원에서 복숭아를 생산하며 모두 원주생협을 통해 유통·판매되고 있다.
논농사는 우렁이농법과 등겨농법을 사용하는 등 친환경농업을 실천하고 있다.
20여년간의 친환경농업 실천은 땅을 살리는 효과를 가져왔다.
생명이 살아숨쉬는 땅으로 변하고 있고 경지를 정리하면서 사라졌던 미꾸라지도 돌아왔다.
박규원(56) 광격리장은 “대부분 마을에서 사라지고 없는 것이 바로 리별 협동조합인데 광격리에는 아직도 1962년도에 설립된 협동조합이 운영되고 있다”며 “공동정미소 사업 등을 광격리 본동과 영산마을, 샘골, 절골, 동막 등 주민들과 함께하면서 농촌마을의 전통을 되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자랑했다.
영산마을을 비롯해 광격리 45농가가 친환경농업을 주민들의 협력하에 실천하면서 생명의 땅으로 다시 태어나고 있는 이곳의 주민들은 한결같이 말하고 있다.
바로 ‘생명이 희망’이라고.
원주=원상호기자 theodoro@kwnews.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