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설가 김별아가 말하는 '최초 여성 의병장' 윤희순 의사
봄내(春川) 분지의 뜨거운 여름과 차가운 겨울도 어지간하지만, 서간도의 혹독한 자연 조건은 그에 비할 바 아니었다. 긴 겨울은 봄내에 봄꽃들이 만발할 4월까지 이어져, 사나운 채찍처럼 윙윙거리는 바람소리와 함께 지독한 추위가 뼛속을 파고들었다.
“참으로 독한 추위요. 왜놈보다도 더 독하오!”
조선인들은 이를 갈며 이방의 겨울을 견뎠다. 땅은 척박했고 물은 흐렸다. 시시때때로 홍역과 천연두와 장질부사가 돌았고, 수토병 혹은 만주열이라 부르는 풍토병으로 노인과 아이들이 떼죽음을 당했다. 이방인들을 노리는 마적단의 습격도 위험했지만 텃세를 부리는 중국인들과의 갈등도 심했다. 그들은 나라를 잃고 상갓집 개처럼 떠도는 조선인들을 꺼우리(고려인)라 부르며 멸시했다. 그 꺼우리들이 바로 서간도를 독립군 기지 건설운동의 요람으로 삼기 위해 이주한 청년들, 의병전쟁을 벌였던 포수들, 강제해산당한 군인들, 장래를 도모하며 무관교육을 하려는 혁신유림과 그 자손들이었다.
윤희순 의사는 1911년 시아버지 유홍석, 남편 유제원과 함께 그곳에 갔다. 그리고 끝내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한 채 한스러운 숨을 거둘 때까지 24년 동안 그 열탕이자 냉동고 같은 이방에서 살았다. 그러는 사이 시아버지가, 남편이, 마침내는 대한독립단에 가입해 투쟁하던 맏아들 돈상이 일본경찰에게 잡혀 고문을 당한 끝에 세상을 떠났다. 슬픔보다 더한 슬픔, 불행보다 더한 불행이었다. 하지만 윤희순 의사는 일흔여섯의 고령임에도 마지막 순간까지 결기를 잃지 않았다. 1935년 8월 1일, 아들 돈상의 순국 열흘 뒤, 자손에게 훈계하는 글과 일생기록을 남긴 채 고단한 일생을 마감했다. 시신은 해성현 묘관둔 북산에 묻혔다.
1860년 경기도 구리에서 윤익상과 평해 황씨의 큰딸로 태어난 윤희순은 유학자 집안의 규방 처자로 자라났다. 열여섯 살에 시집 간 춘천의 고흥 유씨 집안 역시 화서 이항로의 학통을 이은 전형적인 반가였다.
조선 여성사는 한마디로 '여성 수난사'나 다름없다. 개성을 감추고 주장을 억누르며 숨죽여 존재를 드러내지 않아야 훌륭한 여인이었다. 나라를 걱정하고 나라를 위해 싸우는 일은 세상의 주인인 남성들의 몫이었다. 하지만 철저한 통제와 명분의 세상에서도 스스로의 삶을 주장하는 여성들이 있었다. 그들은 전형적인 순종형의 '조선 여인'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누구보다 당당하게 자신의 시대를 살다 간 여성들이었다.
백범 김구의 곁에는 “뜻이 있으면 반드시 열매가 맺는다!”는 말로 칠난팔고를 함께 이겨낸 어머니 곽낙원 여사가 있었다. 안중근 의사의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는 아들의 수의를 꿰매며 “마지막 길에 비굴하지 마라. 훗날 천당에서 만나자”는 편지를 썼다. 곽낙원 여사와 조마리아 여사의 기개는 윤희순 의사와 일맥상통한다. 가족을 통해 독립 운동을 접하고 그들의 지원자로서 뒷바라지에 힘쓴 점도 같다. 하지만 윤희순의 특이점은 그 같은 역할을 뛰어넘어 자신이 의병이 되었으며, 혼자만이 아니라 뜻을 함께 하는 여성들을 규합해 '안사람 의병단'이라는 여성 조직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는 항상 그림자로 살기를 강요받았던 여성으로서의 운명과 정면으로 맞서, 스스로 역사가 된 것이다.
1895년 명성황후가 일본 폭도들에게 살해당하고 단발령이 선포되자 을미의병이 일어났다. 유홍석도 강원도와 충청도를 두루 다니며 의병을 모아 비밀히 군사 훈련을 시작했다. 마침내 유홍석이 의병 출정을 위해 집을 떠날 때, 윤희순은 자신도 의병에 따라 가겠다고 나섰다. 하지만 시아버지는 며느리를 조용히 달래었다.
“너는 집안 종사에 힘쓰도록 하라. 우리가 전장에 나가 소식이 없더라도 조상을 잘 모시도록 하라. 자손을 잘 길러 후대에 충성된 자손으로 길러 훌륭한 자손이 되도록 하며 너희들은 이런 일이 없도록 해주길 바란다.”
일찍 세상을 떠난 시어머니 대신 집안의 안주인 노릇을 해야 했기에, 윤희순은 함께 출정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10개월 동안 집을 떠났던 유홍석이 잠시 돌아와 그간의 전투담을 들려주고 다시 떠날 때, 윤희순은 더 이상 기다리며 애태울 수 없었다. 며칠 후 동리에 배고픈 의병들이 몰려와 밥을 지어달라고 청했을 때, 윤희순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깨달았다.
윤희순은 동리의 아낙들을 모아 놓고 “우리도 적극적으로 의병을 도와주자”고 주장했다. 처음에 아낙네들은 각자 어려운 형편을 내세우며 쉽게 찬동하지 않았다. 하지만 유인석과 유홍석 등 의병장을 배출한 유씨 집안이 앞장서 나서자 차차로 아낙네들도 찬동하였다. 그리하여 의병을 돕기 위한 안사람들의 모임이 결성되었고, 의병이 동리에 찾아올 때면 합심하여 울력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윤희순은 우리 역사와 문학에서 특이한 족적을 남기게 된다. 바로 여성들에게 독립구국의식을 불러일으키고 청년들의 투쟁심을 고무시키기 위해 '경고문','안사람 의병가', '포고문' 등의 글을 지어 각 가정에 돌린 것이다.
아무리 왜놈들이 강성한들, 우리들도 뭉치면 왜놈잡기 쉬울세라.
아무리 여자인들, 나라사랑 모를쏘냐.
아무리 남녀가 유별한들 나라 없이 소용 있나.
우리도 나가, 의병 하러 나가보세. 의병대를 도와주세
금수(禽獸)에게 붙잡히면, 왜놈 시정(施政) 받들쏘냐, 우리 의병 도와주세
우리나라 성공하면, 우리나라 만세로다. 우리 안사람 만만세로다.
- 안사람 의병가
노래는 힘이 셌다. 아이들이 부르고 청년들이 부르고 마침내 새댁들까지 부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윤희순은 이것만으로 만족할 수 없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분노와 통한으로 다시 의병이 떨쳐 일어났다. 하지만 유홍석의 부대는 현대식 병기로 중무장한 일본군에 밀려 춘천 의암소, 홍천 등에서 패했다. 그럼에도 불굴의 의지로 남면 가정리에 다시 진지를 구축하고 청년 600여 명을 모았을 때, 윤희순도 안사람 의병 30여명과 함께 참전했다. 안사람 의병은 부대의 식사, 빨래 등을 도맡은 한편 스스로 투쟁할 힘을 기르고자 고된 훈련도 마다하지 않았으며, 군자금 마련을 위해 69명의 안사람들로부터 도합 350여량(兩)을 수합했다. 소통과 공감과 설득의 힘, 여성들의 힘이 낳은 성과였다.
1910년 한반도가 일제에 병탄된 후 중국으로 망명한 윤희순 의사의 삶은 고단하지만 눈부셨다. 무논을 개발해 벼농사를 짓고,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노학당을 창립하고, 중국인과 조선인에게 항일애국 노래를 가르쳤다. 윤희순이 '뒷바라지'로 대변되는 조력자의 역할에 그치지 않고 스스로 항일운동가로 우뚝 섰다는 사실은 시아버지와 남편이 세상을 떠난 1915년 이후의 족적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일제의 탄압으로 노학당이 폐교되자 윤희순은 무순 포가둔으로 이주해 조선독립단을 만들었다. 1926년에는 조선독립단 가족부대, 조선독립단 학교를 설립했으며, 고령의 몸으로 직접 의병 훈련에 참여했다. 1932년에는 무순에서의 투쟁 계획이 사전에 발각돼 실패하자 봉성현으로 자리를 옮겨 지속적으로 항일운동을 전개했다.
마지막 눈을 감는 순간까지, 그녀는 싸움을 멈추지 않았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점은 윤희순은 일제라는 외부의 적뿐만 아니라 내부의 적-여성이라는 존재적 한계와 편견에 도전해 투쟁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유씨 일가의 독립운동은 위정척사와 복벽주의 등 보수적인 이념에 기반하고 있었으나, 윤희순의 투쟁만큼은 시대를 앞선 진보성을 드러낸다. 여성의 근대는 신여성과 모던 걸, 교육받은 소수의 엘리트들로부터만 시작되지 않았다. 혁신 유림의 아내이자 며느리로 규방을 박차고 광장으로 나온 윤희순이야말로 근대 여성의 선구자가 아닐 수 없다.
윤희순 의사는 특별한 여성이었다. 일경이 유홍석의 행방을 캐내고자 윤희순과 어린 아들 돈상을 붙잡아 가두었을 때, 놈들은 처음에 윤희순을 위협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자 돈상을 때리면서 아들을 죽여도 말하지 못하겠느냐고 위협했다. 그때 윤희순은 이렇게 답했다. “자식을 죽이고 내가 죽을지언정 큰일하시는 시아버님을 죽도록 알려 줄 수는 없다!”
나라를 위해 자신은 물론 자식까지도 버리겠다는 의지, 소아(小我)를 희생해 진아(眞我)를 구하겠다는 결기는 모성의 신화를 넘어선 우리 역사의 새로운 여성상이다.
그녀를 기억하고 기록하는 사람들이 남아있는 한, 윤희순 의사는 항상 우리 곁에서 뜨겁고 벅차게 숨 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