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횡성읍내를 벗어나 원주 소초로 향하는 샛길을 따라가면 횡성읍 생운리가 있다. 덕고산 자락에 있는 생운리를 가로질러 자연생태하천 생운천이 흐른다. 150년 수령의 보호수인 느티나무를 지나 봉화산쪽으로 오르면 노란대문 집이 있다. 이 집은 '새내기' 횡성 사람인 작가 이철영(51)씨가 머루·다래와 함께 사는 보금자리다. 머루와 다래는 이 작가가 횡성으로 오면서 데리고 온 진돗개 암·수 한쌍이다. 결실의 계절 가을을 재촉하는 빗속에 어렵사리 보금자리를 찾아간 취재진을 이 작가는 대문밖까지 나와 반갑게 맞았다. 머루와 다래도 꼬리를 마구 흔들며 낯선 방문객을 편하게 대했다.
노란 대문을 들어서자 100평 가량의 잘 가꿔진 잔디 마당이 여유를 더했고, 한때 유행했던 빨간 벽돌 집안은 온갖 '잡동사니'가 사람 사는 냄새를 풍겼다. 세련되고 깔끔함과는 거리가 있었지만 서재와 거실, 주방 곳곳은 이 작가의 다양한 취미와 생각을 엿볼 수 있는 소품들이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고 있다. 원두커피, 라이터와 담배, 재떨이가 식탁을 차지했고 안방쪽 벽에는 예닐곱개의 검도용 목검과 죽도가 가지런히 걸려 있다. 넓지 않은 서재는 네 벽면이 모두 책으로 채워졌고 클래식 기타, 전문가용 디지털 카메라도 한켠에 놓여있다. 거실은 컴퓨터와 함께 꽤나 오래된 커다란 스피커의 오디오가 분위기를 잡고 있다. 이 작가가 손수 만든 원두커피를 마시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 독자들에게 본인 소개를
“부모 고향은 횡성에서 멀지 않은 충북 제천입니다. 형제가 5남매인데 위로 4남매는 모두 제천태생이고 부모가 부산으로 이주하신후 막내인 제가 태어났죠. 그래서 저는 부산이 출생지가 됐지만 제천도 고향인 셈이죠. 부산에서 중학교를 다니던 1학년때 서울로 전학을 했고 이후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고 삶의 터전을 꾸리게 됐습니다. 고등학교때 문예산문반 활동을 하며 글쓰기를 처음 접했고 글쓰기 훈련을 시작했죠. 그 일이 직업이 된겁니다. 한때 무역회사를 다니긴 했지만 1984년 출판사에 입사해 글쟁이 인생을 시작했죠.”
■ 명함에 대한검도회라고 큼직하게 쓰여있는데요
“출판사 일이 재밌었어요. 서울예전 후배가 소개해 준 출판사였는데 '돈보다 하고 싶은 일하고 산다'는 것이 좋았죠. 수학교재 전문 출판사였는데 그 회사 사장이 연말 업무 종무식에서 전직원이 검도를 하라고 엄명(?)을 내렸죠. 처음에 하기 싫었지만 봉급쟁이로 회사는 계속 다녀야겠고…, 하는 수 없이 새벽부터 검도장을 다녔어요. 잘먹고 잘자고 하는 게 건강비결이라고 생각했는데 3~4개월 검도장을 다니다보니 슬슬 재미가 붙더라고요. 그러다보니 어느새 검도 마니아가 됐어요. 모든 관심이 검도에 이르자 스스로 자료를 찾아 공부했습니다. 검도는 하체가 중요하다는 자료를 보고 하체 단련을 위해 마라톤을 시작했죠. 중독성이 강하더라고요. 마라톤 풀코스를 8번 완주했죠. 4시간가량 걸려 주파하는데 물론 제겐 기록이 중요한 건 아닙니다. 서울의 한 신문사가 주최한 마라톤 대회에 검도복을 입고 호구 등 장비를 모두 갖추고 출전해 10㎞를 달렸는데 이일로 언론 인터뷰도하고 유명세를 타면서 검도계의 유명인사가 됐었죠.(웃음). 나중에 고단자들이 '이 친구가 그 친구야?'라며 '괴짜 검객'을 알아보더라고요. 그런 인연으로 대한검도회 회보 발간위원·편집위원에 위촉돼 활동하게 됐습니다. 그렇게 인연 맺은 검도가 벌써 4단이 됐으니 꽤 시간이 흘렀죠.”
■ 출판사 일은 어떻게 됐습니까
“봉급쟁이로 출판사를 다니다 보니 '독립을 해 내 출판사를 한 번 해보자'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과감히 회사를 관두고 창업을 했죠. '푸른별'출판사였습니다. 1990년 '시, 내 젊음의 초상'이라는 제 작품집도 냈죠. 하지만 회사 경영이라는 게 말처럼 쉽지 않더라고요. 봉급생활은 가능했지만 모든걸 다챙겨서 해야 하는 사업은 역시 체질이 아니었던가봐요.(웃음) 2년여동안 경영과 씨름하다 회사를 접었죠. 그때 마침 모교인 덕수상고에서 100년사 편찬을 했는데 집필에 참여하면서 자연스럽게 회사는 정리됐습니다.”
■ 횡성에 정착하신 후 생활은
“인생엔 (필연보다) 우연도 참 많죠? 서울에 살 때 서재를 옮겼다고 사진을 인터넷 홈피에 올렸더니 횡성에서 부동산하는 친구가 자신이 거래하는 매물 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이 왔어. 취미로 찍어온 사진 실력이 괜찮았는지. 그때 와 본 횡성의 전원주택이 너무 아름다웠어요. 그래서 횡성에서 살면 좋겠다는 생각과 말을 하게 됐는데 때마침 고교 선배가 집을 빌려주겠다고 했어요. 그 집이 바로 지금 살고 있는 이 곳입니다. 얼른 서울의 집을 정리하고 짐을 꾸려 이사를 했죠. 2010년에요. 막상 이사를 하려니 주변에서 시골은 '텃세'가 심해 고생할 거라는 둥, 혼자가서 뭘하고 살거냐는 둥 주변의 말들이 많았어요. 9월쯤에 혼자 왔는데 성격이 별로 외향적이지도 못하고 해서 혼자 사진 찍으러 다니고, 원주에 지인이 운영하는 검도장 다니고 하면서 시간을 보냈죠. 몇 달을 그렇게 보낼 즈음 구제역이 발생했어요. 자주 마을 밖으로 다니다 보니 구제역 방역초소를 운영하는 주민들에게 미안했죠. 미안한 마음에 조금이나 도움을 드리려고 담가뒀던 매실주나 들어오는 길에 통닭을 사다 위문을 하게 됐고 점점 이웃들과 대화의 시간이 늘어 자연스럽게 가까워지게 됐습니다.”
■ 마을을 위해 이런저런 일을 하신다죠
“이사 와서 처음 한동안은 낯설어서 그런지 대문을 꼭 잠그고 살았어요. 그게 잘못이었죠. '내가 먼저 열어야 한다'는 생각을 못했던 거죠. 구제역 이후 이웃들과 친해지자 동네 아주머니들이 맛있는 음식들을 가져다 주셨고 심지어 반찬까지 나눠 주셨어요. 너무 고마워 받기만 하면 안되겠다는 생각에 베풀것이 없나 궁리 끝에 글, 사진 이런 건 좀 하니까 마을 어르신들에게 컴퓨터 지도를 해 보겠다고 마을회의에서 말씀드렸죠. 인근 마을 디지털 공부방에서 컴퓨터 5대를 가져와 자판 익히기부터 시작했죠. 지금은 방학인데 농번기 끝나고 개학하면 어르신들의 실력이 얼마나 늘었을까 기대됩니다.
새농촌건설운동이 있더라고요. 참 좋은 사업이에요. 주민 스스로 잘살아보겠다는 노력을 하면 적지 않은 지원이 있더라고요. 요즘은 주민들과 새농촌건설운동에 나서고 있어요. 박순환 이장, 진도용 새마을지도자를 중심으로 주민들이 똘똘 뭉치고 있고 저는 사무장 직함을 받아 자료 정리, 서류 작성 등을 돕고 있습니다. 올 5월 마을어귀에 장승을 세웠는데 마침 장승제작을 하는 후배가 있어 재능기부를 받았죠. 6월에는 장승제도 지냈어요. 내년 대보름에는 마을 축제로 발전시켜 주민 화합 한마당 잔치로 만들 계획입니다. 이같은 노력을 지속적으로 추진해 꼭 새농촌건설운동 우수마을에 선정되고 잘사는 생운리가 되도록 할 겁니다.”
■ 인생 철학과 앞으로의 계획은
“본래 계획같은 걸 잘 못 세워요. 일단 하고 보자는 주의죠. 준비하고 계획 세우고 하다보면 못하기 십상이죠. 전원생활도 과감하게 결단해야지 동경만 하다보면 안돼요. (웃음) 시집 한권 낸지도 오래됐고 작품은 좀 써야겠어요. 청탁받는 자서전을 쓰고 있어요. 일단 생활비는 있어야죠.(웃음) 마을회관에 작은 도서관도 하나 만들거예요. 우리 집 잔디 마당에서 야외영화제, 음악제도 열어 볼 생각이고요. 뭘 했나 싶은 비슷한 일상보다 하고 싶은 일을 할 겁니다. 공부를 꽤 잘하던 아들(이민규)이 뮤지컬을 하겠다며 연기학원을 보내 달라고 할 때 반대하면서 생각했죠. '나는 하고 싶은 일하면서 왜 아들이 하고 싶은 건 말릴까'라고요. 그래서 생각을 바꿨고 아들은 지금 뮤지컬을 열심히 하고 있어요. 좋은 사람들과 하고 싶은 일 맘껏하는게 인생 최고의 행복 아닐까요.”
횡성=유학렬기자 hyyoo@kw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