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9년 제10대 대통령 선출
신군부 압력에 1980년 사임
NPT 가입·원유 확보 담판
외교가·행정가로 일화 회자
부인 조심·비서 조심·자녀 조심
총리 취임후 부정부패 늘 경계
대한민국 헌정 사상 직업공무원으로 과장과 국장, 차관, 장관, 국무총리를 차례로 거쳐 대통령이 된 첫 번째 인물. 16일은 3·1 만세운동이 펼쳐진 1919년 태어나 2006년 10월 소천한 최규하 전 대통령의 탄생 100주년이 되는 날이다. 대한민국의 국익을 수호하는 외교관과 청렴한 행정가로 공직을 수행하다 신군부의 탄압으로 취임 8개월만에 대통령직을 내려놓아야 했던 비운의 대통령. 최규하 전 대통령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3회에 나눠 최 대통령을 재조명한다.
최규하 전 대통령은 1979년 10월26일 박정희 대통령의 서거로 치러진 통일주체 국민회의에서 제10대 대통령으로 선출, 12월21일 취임했다. 하지만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신군부의 압력에 의해 대통령 취임 8개월여 만인 1980년 8월16일 사임한 뒤 서울 서교동 사저에서 말년을 보내야 했다.
신군부에서는 정권 찬탈의 합리화를 위해 최 대통령을 우유부단한 대통령으로 폄하시켰고 민주 인사들은 신군부 쿠데타를 막지 못한 허수아비 대통령이라고 평가절하했다.
하지만 정치인이 아닌 외교가와 행정가로서 최 대통령이 남긴 업적과 청렴함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수많은 공직자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최 대통령은 외무부(현 외교부) 장관 시절인 1968년 핵확산금지조약(NPT) 가입 문제를 놓고 주한 미국대사와 가진 담판에서 미국의 압력을 이겨내고 대한민국에 유리한 성과를 이끌어 내며 지금의 '한·미 연례안보협의회'의 기초가 된 '한·미 국방각료 연례회의'를 성사시켰다. 1973년 청와대 외교담당 특별보좌관으로 근무하던 당시 1차 오일쇼크 때 직접 사우디아라비아를 찾아 사우디 국왕과의 담판을 통해 원유를 확보한 일화는 외교부 내에서 아직도 회자되고 있다.
최 대통령이 평가받는 가장 큰 업적은 청렴이다. 최 대통령은 총리 취임 후 '부인 조심, 비서 조심, 자녀 조심'이라는 말로 부패를 경계했다고 한다.
공직에 몸담고 있는 동안 국내외 출장을 다녀오면 출장비를 아껴 다시 국고에 반납했다. 연탄보일러, 흰 고무신, 30여년 된 라디오, 50여년이 지난 선풍기, 구멍 난 구두 등이 전시된 서울 서교동 가옥은 최 전 대통령의 청렴함과 검소함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최규하대통령기념사업회 함종한 이사장은 “대한민국 역사상 최 대통령 만큼 능력과 청렴을 갖춘 지도자는 없었다”며 “그의 청렴정신을 살려 청렴한 사회, 행복한 국가를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원주=이명우기자 woolee@kw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