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4년 제6대 춘천교구장 착좌 후 15년간 도와 인연…2010년 은퇴
한솥밥한식구 운동·북강원도에 60만장 연탄 지원 등 北 돕기 앞장
명도학당·인터넷 사목 눈길…교황 요한 바오로2세 한국어 가르쳐
장익 주교는 1994년 12월 제6대 춘천교구장에 착좌한 이후 16년간 봉직해 오면서 강원도와 깊은 인연을 맺었다.
그는 2010년 3월20일 은퇴미사를 끝으로 춘천교구장 자리를 떠나면서 가진 교구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고향이 따로 있느냐, 깃들어 살면 그곳이 고향”이라는 말을 하며 강원도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장익 주교의 사목표어는 '하나되게 하소서'이다. 유일한 분단교구인 춘천교구의 현실적인 고민이 담긴 사목표어처럼 그는 인도적 대북 지원을 몸소 실천했다. '한솥밥한식구 운동'을 펼쳤고, 교구 내에 한삶위원회를 꾸려 체계적인 지원이 이뤄질 수 있도록 노력했다. 춘천교구장 재임기간 북강원도 지역에 60만장의 연탄을 지원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늘 겸허하게 고개를 숙이며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다. 특히 '바른 길을 밝히는 봉사자'를 양성하기 위해 신자들의 재교육을 위한 '명도학당'을 개설해 직접 강의에 나서는가 하면 춘천, 남춘천, 서부, 중부, 영동, 영북 등 총 6개 지역으로 구분되는 넓은 교구의 크기를 감안해 인터넷 사목을 적극 활용해 눈길을 끌기도 했다.
장익주교는 춘천교구장 착좌 전부터 신자들 사이에서 성덕과 학덕을 겸비한 인물로 꼽히며 늘 주교 후보로 꼽히던 인물이었다. 1984년 한국교회 창립 200주년 당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시성식 대미사를 우리말로 집전할 수 있도록 직접 한국어 교본을 만들어 교황을 가르친 것으로 유명하다. 이에 앞서 1989년 10월에는 정의철 신부와 함께 교황청 파견 특사 자격으로 평양을 방문하는 등 바티칸과 북한과의 관계 증진에도 크게 공헌해 왔다. 또 1989년 서울 세계성체대회를 이끌면서 주제 강연을 독일어, 한국어, 영어, 불어 순으로 4개 국어를 메모없이 연이어 동시 통역을 해 주위를 놀라게 했다.
그는 1933년 11월20일 장면박사와 김옥윤 여사 사이에서 출생했다. 경기중·고를 졸업한 후 미국 메리놀대 인문학과, 벨지움 루벵대학 철학과(1959년) 오스트리아 인스부룩대학 신학과(1963년) 를 졸업하고 1963년 3월에 사제서품됐다. 한국 천주교회 성화와 서울대 미술과 창설을 주도했던 장발 교수가 그의 삼촌이며 영원한 도움의 성모수녀회 초대원장으로 공산군에 피랍된 뒤 순교한 것으로 추정되는 장정온(마리 앙네따) 수녀가 고모이기도 한 독실한 가톨릭 가문 출신이다.
오석기·이현정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