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다음에 훌륭한 예술가가 되겠습니다”
홍천초교를 다니던 한 아이가 있었다. 그 아이는 꿈에 대해 써보라는 담임 선생님의 말에 서슴없이 ‘예술가’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산과 들만 뛰어다니던 초교 1학년, 여덟살 꼬맹이 머릿 속에 왜 하필 뜻도 모르는 그 말이 자리잡고 있었는지 아무도 모른다. 당사자도 그 시절 왜, 어떻게 그 말을 하게 됐는지 아직까지 모르겠다는 건 매한가지다. 아마도 숙명을 알리는 전조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그 말이 방언처럼 툭하고 튀어 나왔으니 말이다. ‘집합(Aggregation)’이라는 작품으로 널리 알려진 세계적인 한지 조형작가 전광영의 어린시절 이야기다.
경기도 용인에 있는 전광영 스튜디오에서 지난달 10일 그를 만났다. 워낙 해외 활동이 많다보니 좀처럼 국내 인터뷰가 쉽지 않지만8촌 형님인 전상국 작가의 문학의 뜰에서 우연히 만나 인사를 나눈 인연으로 내친 김에 이날의 인터뷰 약속까지 잡을 수 있었다. 세계 유수의 언론과 많은 인터뷰를 했다는 그이지만 더 많이 떨린다는게 그의 첫 마디였다. 그의 인생에서 늘 짝사랑의 대상이던 것이 강원도니 더 그럴 수 있겠다 싶었다.
가장 궁금했던 점을 첫 질문으로 가져왔다. 세계적인 작가지만 강원도에 대한 얘기는 없었던 것 같다고 물었다. 어린시절이 어땠는지를 묻는 질문 중에 나왔던 물음이었다. 그런데…, 답변보다는 핀잔에 가까운 말들이 돌아왔다.
“지금 우리 기자님이 조금 오해하시는게 있어요. 제가 혼자 수많은 세월을 짝사랑한게 강원도입니다. 제 도록 같은 것을 보시면 고향인 강원도 홍천에 대한 이야기가 꼭 나와요. 나에 대해 95% 정도를 모르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단호함에 짐짓 놀랐다. 그럴리가. 백남준에 비견되는 세계적인 아티스트인 그를 어떻게 모를 수 있겠는가. 그의 저간의 얘기를 들으며 충분히 섭섭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러니 1…서울유학, 미술 입문
홍천 최고 부호의 집에서 태어난 이대독자다. 그 시절 전작가의 아버지는 탄광을 갖고 있었고 연탄공장과 양조장, 사슴목장을 보유하고 버스회사 3대 주주로 있었다고 하니 어마 어마한 부자였던 셈이다. 하루는 전작가의 아버지가 그를 춘천으로 데려갔다고 한다.
“초등학교 6학년때인가. 아버지가 날 보고 춘천을 좀 가자고 그래요. 어린놈이 춘천을 간다니까 좋아서 따라 나섰죠. 그런데 춘천의 아주 허름한 동네를 보여 주시는 겁니다. 그리고는 “보거라 내가 너만할 때는 이런 집도 없었단다” 그 말씀을 듣고 중학교 1학년부터 서울 유학을 떠나게 됐습니다.”
아마도 사업가였던 그의 아버지가 일찌감치 정신(?) 교육을 시키기 위해 나름의 충격요법을 썼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유학이 그의 운명을 예술로 이끈 가장 큰 모멘텀이 됐으니 아이러니의 시작은 이제부터였다.
중학교 1학년에 입학한 그. 수업시간에 그린 학교 모표(帽標·모자에 붙이는 표지) 디자인이 선생님의 눈에 단번에 들어온 것 이다. 그리고는 선생님으로 부터 그림 그릴 생각이 없냐는 질문이 들어왔다. 선생님이 시골에서 올라온 1번 전광영을 알아보는 순간이었으니 그저 감지 덕지한 일이었다. 앞뒤 가릴 것 없이 그렇게 미술을 시작한다.
그렇게 그는 미술을 시작한다. 아버지의 반응이 걱정이었지만 미술을 멈추기에는 그의 표현대로 이미 중독된 후였다.
“(아버지께서)그림을 그리고 있다는 사실을 아시고 딴짓하지 말고 공부만 열심히 하라는 말씀을 하시더라구요. 고등학생이 된 이후에는 미술도구를 태워버릴 때도 있었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고3때는 학교 미술반에서 밤 10시까지 그림을 그리고 뭐 이렇게 하다 보니까, 마약으로 말하자면 (미술에) 중독이 확 돼 버린거죠. (웃음)”
그러던 그는 결국 고등학교 3학년 때 아버지와 절연을 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그때 아버지의 마음속에는 우리 아들 서울 법대 보내 고등고시 패스하고 판·검사만 되면 나중에는 국회의원을 시키겠다는 게 있었어요. 그게 아버지 꿈이었어요. 각본이 그랬어요. 하필 환쟁이 되겠다고 하니까. 하늘이 무너지셨겠죠.”
전작가는 이 시기 아버지에게 처음이자 마지막 거짓말을 한다. 법대 시험을 치르겠다고 말한 것이다. 하지만 홍익대 미대에 원서를 넣었고, 합격을 해버린다. 우여곡절 끝에 할머니가 동네에서 빌린 돈으로 입학금을 내고 대학생활을 시작한다.
#아이러니 2…가정교사, 열린 미국 유학 길
지원이 끊겼으니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다. 마침 그림 가정교사를 구한다는 곳이 있었는데 하필 박정희 정권의 청와대 경호실 차장 집이었다. 또다른 아이러니는 여기서 시작된다.
“아이들을 가르치다 나중에는 경호실 차장님에게도 미술을 가르치게 됐죠. (미술을)성공에 위해서 필요한 지식으로 생각한 것 같아요. 나중에는 자신이 도울 수 있는게 뭐냐고 묻더라고요. 그래서 미국에서 공부를 하고 싶다고 얘기한거죠. 도움을 받아 어렵지 않게 여권을 만들어 미국에 유학을 가게 된겁니다.”
그렇게 떠난 미국에서의 유학생활은 녹록치 않았다. 불법 체류자 신분이되는 등 팍팍한 삶도 그랬지만 조그마한 동양인이 서양의 전유물인 미술로 그들과 경쟁하는 일은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어렵게 미국에 가서 공부를 하다보니 이제껏 내가 선생님한테 배운 페인팅들이 전부 서양 쪽의 이야기인 겁니다. 그 고장에 와 봤더니 내 앞에 있는 건 전부 돌벽처럼 느껴졌어요. 48kg의 연약한 젊은이가 느낀 문화의 충돌, 돈의 궁핍 속에서 이건 아니다. 느끼게 된 것입니다. 언제가 다시 돌아와서 너희들 사회에서 대등하게 경쟁할 날이 올것이다. 입술을 깨물고 12년만에 돌아 왔습니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전작가. 그런데 이번에는 계열, 파벌과 맞부딪치게 된다. 어느날 힘들어하는 표정을 하는 아내에게 그는 6개월의 여행을 제안한다. 전작가에게는 마지막 기회였다. 예술에 있어서 나만의 것을 찾아야겠다는 절박함이 있었다. 우리 조상들의 생활상을 아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민속박물관을 다니기 시작한거에요. 우리 조상들이 이런 걸 가지고 일을 하고, 놀았구나 생각했죠. 그런 사고방식에서 나온 유전자를 갖고 있는 나인데, 내가 미국 애들 앞에서 마이클 잭슨 노래를 부르고 있었구나 생각했죠.”
#아이러니 3…고향에서 길을 찾다
그에게 믿기 힘든 일이 벌어진 것은 그가 봉평의 한 박물관에 들렀을 때다.
“이거 거짓말 아닙니다. (나에게는) 신화같은 것입니다. 기적이 일어난거죠. 디딜방아를 보고는 뒤돌아 나오는데 그 옛날 어린시절 듣던 여인네와 아이들의 재잘거림이 들리는 거에요. 이거다. 내가 강원도 촌놈인걸 그제야 다시 깨달은거죠.”
그길로 서울로 내려와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주로 어린시절의 기억들을 회상한 것이 그것이었다.
“큰 할아버지께서 한약방을 하셨어요. 그때 천장에 한자가 가득 쓰여진 약봉지가 달려있던 게 떠오른거죠. 아 이것이 내 안의 DNA 구나 생각했죠. 그래서 한지를 사용하기 시작했고, 서양의 박스문화와 달리 정(情)이 느껴지는 우리만이 갖고 있는 보자기 문화까지를 접목하게 된 겁니다. 한지를 랩핑해서 보자기를 만들어서 이걸 작품을 만들어야 겠다고 말이죠. 거기에 서양미술의 회화법을 도입시키자. 말하자면 전세계에 하나뿐인 돌연변이가 나온겁니다.”
그의 시도는 적중했다. 그의 작품에 담긴 동양적인 서사와 그것을 풀어낸 조형적 시도들은 먼저 외국에서 폭발적인 환호를 받았다. 그리고 전광영만이 표현할 수 있는 유니크 함으로 전세계 컬렉터들의 시선을 사로잡으며 K아트를 선도하고 있다.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오는 27일까지 진행되고 있는 개인전 ‘재창조된 시간들(Times Reimaged)’이 그의 위상을 잘 설명하고 있다. 230여명의 개인전이 열리는 가운데 전작가의 전시처럼 ‘병행전시’ 타이틀은 비엔날레 주최측이 선정하는 20여명에게만 붙는다. 생존작가는 전작가를 포함해 단 네명이다.
“한지에는 애환들이 곁들여 있어요. 수백년을 거치면서 내 손에 올 때까지 얼마나 많은 일들이 있겠습니까. 한지를 만들 때 부터 내 손에 올때까지의 모든 역사를 ‘집합’시켜서 우리나라의 문화와 정체성 등 역사를 한데 싸서…” 그렇게 홍천 촌놈의 ‘집합’이라는 작품은 전세계 미술시장에서 하나의 현상이 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