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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기용 선생 별세]선수생활 짧았지만, 그는 평생 마라토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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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상연맹 전무 시절, 황영조 올림픽 금메달
이봉주 은메달 따는등 한국 마라톤 황금기
최근까지 연맹 고문으로 마라톤 발전 주도

한국 육상을 대표하는 마라톤 영웅인 고(故) 함기용 대한육상경기연맹 고문은 한국 마라톤 발전을 위해 헌신한 불세출(不世出)의 인물이다. 1936년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인 고 손기정 선생, 1947년 보스턴 마라톤에서 정상에 오른 고 서윤복 선생의 뒤를 이어 세계 마라톤 메이저 대회 챔피언 자리에 오른 그는 단순히 마라톤을 넘어 민족의 자긍심을 일깨운 천생 마라톤맨이었다. 선수 시절 보스턴 마라톤을 제패하고, 후에 강원도 후배 황영조의 올림픽 제패까지 이끌어 내며 한 평생을 한국 마라톤에 바쳐온 그의 삶을 되돌아 본다.

◇보스턴 마라톤 1,2,3위를 휩쓴 함기용(왼쪽) 등 한국선수들이 현지 호텔에서 축배를 들고 있다. 강원일보DB
◇보스턴마라톤출전해 현지에서 함기용선수(오른쪽 두번째)가 각국 대표선수들과 연습하는 모습. 강원일보DB

짧고 굵었던 선수 생활=함 고문은 16세가 되던 해인 1946년 고(故) 손기정 선생의 권유로 마라톤에 입문했다.

1948년 런던 올림픽에 예비 선수로 갔으나 경기에 출전하지 못했던 그는 2년 후 보스터 마라톤 대회에서 신화를 이뤄낸다. 대회 당시 경험 부족으로 오버페이스를 한 탓에 후반 언덕길에서 잠시 걷기도 했는데 이를 두고 현지 언론은 ‘워킹 챔피언’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1897년 시작된 보스턴 마라톤은 올림픽을 제외하고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대회로 아시아의 작은 나라에서 온 함 고문의 우승은 전세계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특히 함 고문에 이어 송길윤, 최윤칠 선수가 1~3등으로 골인하면서 주목받았다. 1~3등을 휩쓴 것은 한국이 최초였고. 이 기록은 2007년 케냐 선수들이 달성하기 전까지 57년 동안 그 어떤 나라에서도 이루지 못한 위업이었다.

대통령기록실에서는 당시를 이렇게 표현했다. “감격에 찬 아나운서의 목소리는 승전보를 전하고 또 전했다.

이 소식을 온겨레에 전하기 위해 전국 방방곡곡에 특수배전을 실시하자 사람들의 환호성이 어디서나 들려왔다.” 선수단 일행은 귀국하자마자 바로 경무대(당시 대통령 관저)로 갔고, 이승만 대통령은 “외교관 몇백 명 보내는 것보다 훨씬 애국했다며 눈물을 글썽였다”고 한다. 하지만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다. 1950년 6월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하면서 정상적인 훈련을 할 수 없게 됐다. 어려운 환경에서도 1952년 헬싱키올림픽 출전을 준비했지만 부상 탓에 대표 선발전에 출전하지 못했고, 그렇게 짧고 굵었던 선수 생활은 아쉽게도 마무리 된다.

◇1950년 보스턴마라톤에 출전한 함기용선수(뒷줄 가운데)가 미국 현지에서 손기정 감독(뒷줄 오른쪽)과 동료 2명, 통역사와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강원일보 DB
◇2004년 3월1일 강원일보 앞에서 진행된 3.1절 경축 단축마라톤대회에 앞서 몬주익의 영웅 황영조 선수와 악수를 하고 있다. 강원일보 DB
◇2010년 강원도육상경기연맹과 강원일보사가 공동으로 마련한 보스턴 마라톤대회 60주년 기념식에서 정태섭 당시 춘천시체육회장으로 부터 기념패를 전달받고 있는 함기용 고문.

다시 돌아온 마라톤계, 후배의 올림픽 금메달을 이끌다=선수 생활을 마친 함 선생은 1951년 고려대 상학과에 입학한다. 이를 두고 함 선생은 한 매체와 인터뷰에서 “손기정 등 우리 마라톤 선배들을 보니 사회 나가서 괄시를 받았다. 운동을 잘하더라도 졸업장이 필요했다”고 설명했다. 1955년 졸업 후 그는 산업은행에 들어갔고 이후 중소기업은행으로 옮겨 정년까지 마치고 나왔다.

은행에서 마라톤 팀을 만들어 잠시 마라톤 관련 일을 하기도 했지만 오랫동안 마라톤계를 떠나 있었던 그는 1989년 박정기 당시 대한육상경기연맹 회장이 제안한 전무 자리에 앉으며 마라톤계로 돌아왔다.

그가 전무로 있었던 12년 간 한국 마라톤은 황금기를 맞았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황영조가 금메달을 획득했고, 4년 뒤 애틀란타 올림픽에서는 이봉주가 은메달을 차지했다. 전무 자리를 마친 뒤에도 연맹 고문으로 활동하며 한국 마라톤을 위해 힘써 왔다.

하지만 이봉주 이후 한국 마라톤은 현재까지 오랜 침체기에 빠져 있다. 세계 기록은 2시간 1분대까지 단축했지만 한국 기록은 2000년 도쿄국제마라톤대회에서 이봉주가 세운 2시간7분20초에 머물러 있다.

이에 대해 함 선생은 생전 안타까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자신의 보스턴 마라톤 제패를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진 춘천호반마라톤대회에 매년 참석하면서 꿈나무 육성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지난해 참석한 ‘제18회 춘천호반마라톤대회’에서 그는 “체계적인 프로그램과 유망주 발굴에 힘써 제2, 제3의 스타가 탄생해 과거의 영광이 재현되기를 바란다”며 한국 마라톤의 재기를 꿈꿨다.

하지만 결국 함 선생은 한국 마라톤의 부활을 보지 못한 채 하늘의 별이 됐다. 구순(九旬)이 넘는 나이에도 마라톤 생각뿐이었던 영웅의 바람은 이제 후배들의 몫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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