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The 초점]坐忘(좌망),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연호탁 가톨릭관동대교수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送舊迎新을 떠올리며 일순 마음이 숙연해진다. 연말이다 연시다 하는 구별은 사람이 하는 것이지 시간 자체에 무슨 始末이 있을까. 그럼에도 구태여 시간의 앞과 뒤를 따지는 건, 뭔가 부족한 지금을 연기함으로써 스스로 체면을 지키려는 자존심의 발로일 수 있다.

지난 한 해를 돌이켜보니 누구에게라도 그러하듯 다사다난하였다. 인문도시사업단 일에 꾀부리지 않고 열성을 다 한 건 스스로 생각해도 칭찬할 만하다. 인문학 대중화 사업을 위한 프로그램을 운영하면서 주민들과 자연스럽게 친해지는 기쁨을 얻었다. 그리고 인문학적 소양이 삶에 윤기를 더하는 것임을 새삼 깨달았다.

명색이 선생인 바 나를 키우는 내 공부가 부족했던 건 아쉽다. 무엇보다 염두에 두고 있는 책을 제대로 써보리라는 초기 의욕에 맞게 충분히 성실하지 못했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몸과 마음 건강에 해롭다며 베짱이처럼 빈둥대고 게을렀다. 버트란트 러셀 경이 케임브리지에 입학하며 세운 생의 목표를 생각하면 한층 부끄럽다. 그는 스무 살이 채 되지 않은 나이에 진리 탐구, 진정한 사랑, 고통 받고 있는 인류에 대한 연민과 관심을 생의 목표로 설정했다.

그에 비해 지난 새해 결심이 번번이 공염불이 되고, 또 다시 새해를 맞아 결심 목록에 올려야 할 일이 아직도 남아있다는 것 또한 적잖이 민망하다. 살만큼 살았음에도 여전히 희로애락으로 마음이 동요되는 것 역시 불편하다. 貪瞋癡(탐진치) 三毒心(삼독심)의 무게가 줄기는커녕 갈수록 덩어리가 더 커지고, 그럼에도 오래된 습관으로 잘 살 것을 다짐하는 게 영 부끄럽기 짝이 없다. 오래된 습관 버리기 어렵다고, 눈 가리고 아옹하며 살고 있는 셈이다.

이제 坐忘이 필요한 때다. 莊子에 의하면 사람은 완전한 망각 상태에서 완벽한 자유를 누릴 수 있다고 한다. 좌망은 요즘 흔히 말하는 멍 때리기와 비슷하다. 좌망을 통해 지나간 일에 대한 회한이나 사람에 대한 원망, 이루지 못한 일에 대한 아쉬움, 부족한 자신에 대한 실망감에서 벗어나길 희망한다. 지나간 일, 어쩔 수 없는 일에 대해 무심해지길 기대한다. 지나간 일은 이미 과거이고 어쩔 수 없는 일 또한 돌이킬 수 없다. 그러나 사실 지나간 것을 지나간 대로 그냥 두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용기와 결단이 필요한 일이다. 좌망으로 비워진 마음을 희망으로 채우게 되길 바란다.

희망은 사람을 변모시킨다. 더욱 너그러워져야겠다. 성마르지 않아야겠다. 밝은 마음을 지녀야겠다. 다른 듯 恒用 같은 사람이었으면 한다. 늘 자신을 가꾸는 멋쟁이이고 싶다. 여전히 꿈꾸는 소년이길 희망한다. 허세로 배부르기 보다는 배고파도 정직을 팔지는 않을 소신 있는 장부이길 바란다. 비겁한 만용이 아니라 진정한 용기로 세상 끝나는 날까지 살고자 한다.

엄동설한에는 따뜻한 사람, 화끈 더위에는 서늘한 사람, 살랑 춘풍에는 그리운 사람, 쓸쓸 추색에는 설레는 사람이 되고 싶다. 저녁을 먹고 경포호 주변을 함께 걷고 싶은 사람이 되길 바란다. 비 오는 날 어느 카페에서 카푸치노를 마시다가 문득 그의 선한 미소가 떠올라 덩달아 미소 짓게 만드는 어린 친구가 되길 희망한다.

거친 모래 같은 인생살이는 사람 간 따뜻한 숨결로 견뎌나갈 수 있다. 그리고 지나간 것에 대해 무심함으로써 마음이 자유로울 수 있다. 서운함에 익숙해지기, 화나고 답답한 일에 무뎌지기, 배신과 몰상식 등 온갖 이기의 산물에 물들지 않기가 나의 자유다. 나이가 들면 누구나 철학자가 된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스칼렛 오하라가 말했다.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뜰 거야.” 임인년을 보내고 계묘년 새해를 맞이하여 좌망으로 자유로워지자. Let bygones be bygon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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