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2년 임인년(壬寅年)이 저물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는 ‘갈등과 반목’으로 점철된 1년을 보내야 만 했습니다. 사회 전반은 끝을 알 수 없는 대립이 일상화 되면서 ‘소통과 화합’은 구호에만 머물고 있습니다. 사회통합의 장(場)이 되어야 할 두 번의 큰 선거를 치러내면서 우리는 아주 명징하게, 진영이라는 이름으로 갈라진 사회 분열의 민낯을 보았습니다. 그 분열은 잦아들지 않고 끊임없이 분화하며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믿고 싶은 것만 믿고, 보고 싶은 것만 보려고 하는 ‘확증편향’ 이 사회 전반에 널리 퍼지면서 찬성을 위한 찬성, 반대를 위한 반대가 횡행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절대 이견이 나올 수 없는 ‘이태원 참사’의 추모 분위기에 대한 찬반이 갈리거나 유족들에게 행해지는 2차 가해, 그리고 그것을 두둔하는 목소리가 감히 나올 수 있는 작금의 상황에서 인간성 상실, 도덕성 상실의 위태로움을 보게 됩니다. 이러한 일련의 사회적 흐름들은 ‘효율’이라는 이름을 앞세우고 ‘발전’과 ‘성장’을 위해 앞 만 보고 달리고 있는 우리 사회에 보내는 묵직한 경고의 메시지와도 같은 것입니다. 결코 ‘효율성’이 도덕성, 올바름과 등가의 쓰임새로 사용될 수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한 착각들이 마음 속에 켜켜이 쌓여 누군가의 신조로 고착되면, 집착과 아집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부터 우리는 스스로가 만들어 낸 ‘마음의 안경’을 꺼내들고 세상을 바라 보게 됩니다. 이미 편견의 렌즈로 완성된 안경은 그릇된 시선으로 세상을 보게하고 평가하게 합니다. 제대로 된 세상을 보기 위해서는 스스로 아집을 벗어던져야 합니다. ‘나’ 라는 좁은 틀을 깨트려 더욱 큰 나, 대아(大我)로 거듭나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함께 사는 세상 속에서 행복하고 평화로운 모습으로 되돌아 가는 것을 의미 합니다.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는 것으로서, 대립적인 종파와 이론들을 통합하고 조화를 시도한다는 불교의 화쟁(和諍)사상과 원융적(圓融的·완전히 하나로 융합해 구별이 없는 것)인 세계관에 입각한 사고로의 전환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이러한 생각 속에서 자신이 금과옥조(金科玉條)로 여기고 있는 사상이, 진리가 혹여 어느 한 극단에 치우친 변견(邊見)은 아닌지 스스로 곱씹어야 합니다. 세계적인 미래학자 제러미 리프킨이 그의 책 ‘회복력 시대’에서 말한 것 처럼 ‘효율성의 원칙’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생각을 기반으로 한 대전환의 시대를 우리는 준비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새로운 경험과 생각을 열린 마음으로 받아 들이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자신들이 갖고 있는 편견들을 걷어내는 것이 그 시작점이 될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를 새로운 시대로 이끄는 사회의 통합의 마중물이 될 것 입니다. 논어의 ‘위령공편’에는 ‘過而不改 是謂過矣(과이불개 시위과의)’라는 문구가 나옵니다. “잘못을 저지르고도 고치지 않는다면 이것이 바로 잘못”이라는 뜻입니다. 인간은 그들의 삶 속에서 수없는 실수를 하게 됩니다.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사회라는 울타리 안에서 살아갈 수 있는 것은 그러한 실수를 인지하게 되면 스스로 참회하고, 고쳐가면서 타인과의 이해와 어울림 속에서 사회구성원으로 성장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인류사의 거대한 흐름인 것입니다. 새해에는 이 모든 염려가 일소되는 한 해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도민 여러분의 가정에 부처님의 가피(加被)가 가득하길 기원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