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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칼럼]토끼처럼 다정하게

심윤경 소설가

새해를 알리는 신문에는 맨몸 마라톤이나 바다수영 같은 힘찬 사진이 오르곤한다. 나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그런 사람들은 어딘가 존재하기는 하겠지만 만날 수는 없는, 청룡 주작 봉황 현무 같은 상상속 동물들인 줄 알았는데 놀랍게도 가까운 친구가 새해 첫날 아침 제주도 바다에 뛰어든 사진을 보내왔다. 나는 입을 딱 벌리고 믿을 수 없는 친구의 모습을 여러번 보았다.

양력으로는 새해를 맞이했지만 아직 설날이 오지 않아 임인년이다. 호랑이와 토끼 사이의 이 날들은 한해를 돌아보고 맞이하기 적합한 때다. 나의 2022년은 거창하지 않으나 오목조목 잘 놀았던 좋은 한 해였다.

봄에는 친구들과 ktx를 타고 청주, 공주, 대전 등으로 당일치기 여행을 다녔다. 여름에는 대학 동창들과 속초로 여행을 떠났다. 우리 입학 30주년이라고 거창한 계획들을 세우다가 코로나 때문에 대폭 축소해서 가까운 속초에 펜션을 잡아 1박 놀고 오기로 했다.

연말에는 깜짝 선물처럼 중학교 동창들과 35년만에 재회하며 우리를 다시 이어준 SNS의 위력에 감사했다. 단발머리 소녀들이었던 우리는 직업도 사는 곳도 모두 달라진, 그러나 웃는 얼굴은 옛날과 똑같은 중년 여성들이 되어 다시 만났다. 우리에겐 '동네'라는 추억의 영역이 보장되어 있었다. 우리는 그시절 중딩들의 핫플이었던 떡볶이집, 만화가게, 약과공장 등의 안부를 확인하며 시간을 잊은 하루를 보내고 다시 만날 것을 약속했다.

토끼는 다산의 동물이고 가족을 상징하지만 나는 오늘 친구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친구는 가족과는 또 다른 사랑의 영역이다. 가족이 배타적이고 결속력이 강하다면 친구는 열려있고 느슨한 관계다. 그 느슨함이 꽉 조인 생활 속에 긴장을 풀게 하는 무엇이 된다. 결혼과 출산이 극도로 드물어진 요즘 가족의 범위는 확장되기 어렵고 한번 상실하면 다시 충원하기도 매우 어렵다. 반면에 친구는 확대와 축소가 자연스럽다.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도 하룻저녁만에 가까워지기도 하고, 이런저런 형편이 여의치 않으면 절친이라도 뜸해지기도 한다. 오래 못 보던 친구라도 다시 만났을 때 오랜만이야!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하고 의자를 권하면 끝이다. 그 모든 것이 유연하고 자연스럽다.

조지 베일런트는 <행복의 조건>에서 1938년 시작돼 무려 70년간 이루어진 행복에 관한 종단연구를 소개한다. 이 연구에서는 하버드 법대 졸업생 집단, 아이큐 150 이상의 고지능 여성집단, 보스턴 슬럼가 출신 청소년 집단의 인생을 수십년간 추적해 인간이 노년에 느끼는 행복감을 결정지은 요인이 무엇이었는지 분석하는데 이 연구에 의하면 우리가 흔히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건강이나 직업, 재산, 가족은 뜻밖에도 행복의 결정적인 요인이 아니었다. 노년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행복과 가장 유의미하게 연관되는 결정적 요인은 친밀한 인간관계, 즉 친구의 힘이었다. 젊은 날에는 일과 가족, 여행과 건강 같은 것들이 우리를 감싸고 보호하지만 나이를 먹어가며 우리는 그것들을 하나씩 내려놓아야 할 것이다. 팔다리의 힘을 잃고 가족도 먼저 보내고 돈도 더 이상의 기쁨을 주지 않을 때 인간의 곁에 마지막까지 남는 것은 사랑하고 교감할 수 있는 근원적 능력이다. 친구를 만나 잡담과 근황을 나누는 일은 소소하지만 핵심적인 행복의 근원이며 통장보다 더 중요한 노후대비이다. 호랑이의 기운을 잠시 내려놓고, 토끼들처럼 소소한 다정을 나누는 새해를 맞이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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